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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Oct 03. 2022

변화구

투수는 직구만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  불리한 카운트에 몰릴 때는 자신만의 변화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아내야 한다. 결정적 순간에 값진 스트라이크로 만들어 내기 위해 변화구를 연마해야 하는 투수의 심정과 그 당시 내 마음은 동일시 되었다.



수현과의 첫 만남은 회사 내 팀 사수 관계로 만났다. 나는 인턴이었고, 같은 팀에서 사수인 수현과의 외근이 잦았다. 면허가 없는 수현 대신 운전을 하며 매일 붙어있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제법 있었다.

수현의 첫인상은 회사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날뛰는 망아지었다. 출근은 가방 하나 없이 쇼핑백 달랑 하나 들고 오고, 퇴근할 땐 누구보다도 빨리 사라진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부모님뻘 되는 부장급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데 ‘말을 저렇게 한다고…?’ 매니지먼트 중 하나와 유착 관계인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아니라고 판명되긴 했지만 여전한 혼란스러움을 감출 길 없어 참 별난 사람, 버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대화하면서 조금은 편해진 건지 또래였던 우리는 가끔 옥상으로 올라가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팀 회식일 땐 술 한 잔씩 했다. 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렇게 잠깐 만났다 끝날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한 번씩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의례적인 인사일뿐 진심의 순도는 맑지 않았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거리가 멀어 직접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반년 뒤 퇴근 후 직접 회사근처로 찾아오겠다는 연락에 마다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우린 술을 마셨다. 우리의 대화에서 화자는 주로 수현이었고 나는 수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수현은 나랑 친해지고 싶단다. 상사들이 나와 자기를 많이 비교했다는 이야기는 이직을 한 후 수현의 입으로 처음 전해 들었다. 그게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가 되냐고 웃으며 되물었다. 따라오는 답들은 참 수현 다운 대답이었다. 그 뒤로 수현은 약속 자리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나를 불러냈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어. 수현이가 귀찮게 하는거 아니야?”

“아니에요. 오히려 고맙죠. 제가 무심해서 연락 안하는데 이렇게 잊지 않고 해주는 걸요. 덕분에 이렇게 다 뵐 기회도 생기고 .”

“출장 다녀와서 피곤한 사람이 이렇게 나온 거 보면 모르나. 친한 거 맞네.“

이전 직장 팀 과장님과 실장님, 동기들이 함께한 술자리에 수현은 어김없이 나를 불러내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나 기분좋게 한잔 하고 집에 가려는데 수현이 따로 할 얘기가 있다며 말을 꺼냈다.


“나랑 제주도 안 갈래? 가면 재밌을걸. 같이 가고 싶어"

별안간 제주도행을 제안했다.



첫인상이 무색하도록 수현은 반전의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꽤 영민하고,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재밌고, 행동력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하고 싶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쉽게 보이지만 쉽지 않은 사람. 언뜻 언뜻 보이는 집요함과 진심은 꽤 만만치 않은. 흥미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더 알아가고 싶었다. 덥석 승낙 하고 싶었다. 문제가 생겼다. 제주도 체류기간은 2주 넘게 예정되었다. 내가 수현을 알아가는동안 수현이라면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나를 파악할 것이다. 나를 관찰하게 두느냐 마느냐는 이번 제주행으로 결정이 난다. 수현과의 관계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던 참이라 고민 끝에 제주 행을 승낙했다. 떠나기 전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 변화구를 던졌고, 심판 판정으로 스트라이크가 될지 볼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3주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매일 탑동광장에서 조깅을 하고 시간 맞춰 수현을 깨운다. 에이바우트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을 해 각자 할 일을 한다. 오후는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마침 일정이 겹쳐 4월 3일날, 4.3 사건 관련된 장소를 찾아갔다. 이름 모를 오름도 여러 개 오르고 한라산도 등반했다. 건입동 주민센터에서 사전 투표를 했고, 우리만의 단골 술집도 생겼다. 가끔은 바다 앞 카페에 멍하니 앉아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별을 보겠다고 1100고지에 올라가 놓곤 마주친 야생 고라니가 무섭다고 소리 지르며 10분도 안되게 다시 내려왔다. 가파도에서는 우연히 들어간 편집샵의 사장님이 둘이 같이 히말라야를 오르라고 조언을 받았다. 그 길로 히말라야를 같이 가기로 덜컥 약속도 했다.  서귀다원에 가서 다원 어르신께 제주시와 서귀포시 역사를 들었다. 제주도민들만 가는 식당에서 제주 방언을 배경삼아 밥을 먹었다. 독립서점을 들려 그림일기도 그리고 책도 몇 권 샀다. 제주도 이곳 저곳을 드라이브 할땐 카풀 가라오케 마냥 노래를 불러댔다. 제주도 어딜 가든 만든 추억이 넘쳐 흘렀다.




돌이켜 보면 우린 서로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지쳐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매일 밤 마무리는 술이었다. 길고 긴 제주의 밤 우린 할 것이 없었고, 내가 폴란드에서 가져온 보드카, 스페인에서 가져온 와인, 우리가 사랑한 가파도의 막걸리, 제주도의 양조장에서 사 온 전통주 등 매일매일 종목을 바꿔서 마셨다. 안주삼아 시덥지 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서로의 여행 스토리를 들었고, 친구, 가족에 대해 쉴 새 없이 말했다. 좋아하는 연예인들과 영화, 드라마, 노래들을 추천해 주기 바빴다. 평소 나답지 않은 과한 솔직함으로 수현을 대했다. 못할 말을 하진 않았지만 별말을 다했다. 여행지에서 주는 바이브가 그렇게 만들었을까. 수현이 그냥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고 답을 내렸다.



3주간의 제주도 일정을 끝내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소감을 넌지시 물었다.


"어땠어 이번 제주는?’"

“모든 순간이 봄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알아버렸지만.”

“다음에 제주도 오면 같이 안와도 너랑 다니는 것 같겠다. 하도 돌아다녀서."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우리가 갔던 곳이 유명한 관광지들은 아니잖아. 우리는 왜 비주류에 끌릴까?”

“유별난 성격탓? 관광명소는 다른 사람이랑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데는 너랑만 올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의미인가- 아리송하네.”


“그래서… 나는 어땠는데?”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줄줄 읊어대는 수현에게 약간 질려 버려 입을 막기 위해 눈을 피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나 또한 이번 기간 동안 몰랐던 수현의 모습을 꽤 많이 알게되었다. 에피쿠로스 뺨치게 쾌락주의를 꿈꾸는 자. (에피쿠로스보단 키레네에 좀 더 가까운 쾌락주의지만)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다. 탐이 난다. 왜 수현의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지 이제는 알겠다.



"어? 이거 가파도 편집샵에서 산 엽서잖아." 

"응. 나중에 읽어봐 .” 

"난 아무것도 없는데.." 

"괜찮아. 나 탑승수속 안내멘트 나온다. 먼저 갈게. 조심히 올라가고 서울에서 곧 보자."


헤어지기 전 수현의 손에 편지를 쥐여주고는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던졌던 변화구는 스트라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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