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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젠젠 Dec 27. 2022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기

모스크바행 2

횡단열차 내내 지원의 눈에 계속 밟히던 사람이 있었다. 줄 이어폰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며 자작나무 풍경을 스케치하는 사람. 유난히 하얀 피부에 시원한 이목구비, 언뜻 보이는 눈은 우수에 차 있어서 풍기는 아우라가 인상적이었다. 허리를 한 번도 굽히지 않는 꼿꼿한 모습으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눈에 담는 게 유독 어른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열차 복도로 나가려던 지원은 맞은편 대각선 자리에서 그 사람이 아이들과 함께 모노폴리를 하는 걸 발견했다. 아이들과 편하게 대화를 할 땐 나지막이 웃기도 하는 걸 보곤 지도교사라고 생각한 지원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너무 대놓고 뚫어져라 본 게 멋쩍어 말을 건네 볼까 한 생각을 고쳐먹고 이내 시선을 거뒀다.   

  

“나 정말 귀여운 애 발견했어. 그 친구랑 놀고 올 거야. 이따 봐."

보라는 다른 고등학생 무리에서 이상형을 발견했다며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아이들과 여러 판의 모노폴리를 한 후 지원은 금세 지쳐 버렸다. 아. 이제 더이상은 못하겠다. 다른 칸으로 도망갈까. 모노폴리 판은 토너먼트 경기로 마지막 결승전만 앞두고 있었다. 아이들 곁을 지키던 그 사람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지친 기색을 내비쳤다. 게임 중 그 사람과 여러 번 눈이 마주친 지원은 이 타이밍에 빠져나가야겠다며 무슨 용기였는지 고갯짓으로 뒷좌석으로 넘어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들은 모노폴리 삼매경이었고 자연스레 그 사람과 지원은 뒷좌석으로 옮겨 갔다.    


      

날씨는 제법 쾌청했다. 3월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반짝이는 햇살이 바깥 잔디의 푸르름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지원은 달리는 열차 칸의 창문을 열어 그 서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비어있는 양 침대에 나란히 기대 누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앓는 소리에 그 사람에게서 프스스 바람 빠진 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게 공기가 어색한 탓일까. 지원은 부러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그때부터 제대로 된 대화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지원이야. 너는?”

“캐서린. 카탸라고 불러줘”

“나는 지금 여행중이야. 모스크바에서 내려. 너는 어디가는 길이야? 어디에서 내려?”

“아빠 만나러 가. 모스크바에서 내릴거야.”     


주로 질문은 지원이 하고 카탸는 답해주는 식이었는데 조곤조곤 대답해 주는 낮은 목소리가 제법 듣기 좋았다고 생각한 지원은 아이들 케어가 힘들지 않냐고 이어 물었다. 알고 보니 카탸와 아이들은 열차에서 처음 만난 사이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예상외의 대답에 놀란 지원은 열차 내에서 마주치면서 줄곧 궁금했던 무얼 그리고 있는지도 뒤이어 물었다. 스케치북을 건네 보여준 그림들은 수줍어하는 것에 비해 상당히 수준급이었다. 미술 하는 사람에 대해 평소 동경이 큰 지원은 삐딱하게 누워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달처럼 눈이 동그래져 카탸를 봤다. 우와. 이게 가능하구나. 스케치에 새삼 탄복하며 중얼거렸다.  


        

바깥 창문 풍경은 자작나무숲에서 드넓은 초원으로 바뀌었고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열차 내 차장이 스낵류가 담긴 카트를 끌며 앞뒤 칸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 먹을래? 좋아하는거 있어?”

“마로우자네. 이게 러시아어로 아이스크림이야.” 

“그래, 그거 먹자.”     


피스타치오 맛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씩 문 지원과 카탸는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갔고, 처음의 어색함은 친근함으로 바뀌었다. 나이도 동갑이고 적당히 말랑한 얼굴을 한 지원은 열차 내에 데이터가 터지지 않아 노래를 못 듣는 게 고역이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가만히 듣던 카탸는 블루투스를 켜 폰에 담겨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들을 몽땅 지원에게 보내며 한 곡씩 차례로 소개했다. 보기와 다르게 헤비메탈 좋아하네. 난 시끄러운 거 들으면서 그림 그려. 그럼 집중이 잘 돼? 오히려 차분해지더라고.   


       

“스케치하는데 얼마나 걸려?”

“오래 안 걸려.”

“내 모습 그려달라고 부탁하면 내가 너무 무례한가?”

“아냐. 한글도 알려줬는데 선물로 그려줄게.”     



지원의 그림을 그린 카탸는 스케치는 좀 더 수정한 뒤 내리기 직전 주겠다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라가 곧 왔고 주변 친구들에게 가져간 태극기에 각자 언어로 하고 싶은 말을 적어달라고 했다. 너도 나도 한마디씩 적겠다는 아이들 덕에 태극기는 빼곡하게 각자의 언어들로 채워져갔다. 열차는 곧 모스크바에 다다르고 내리기 직전, 지원은 한국에서 가져간 엽서에 짧게 편지를 써 선물과 함께 카탸에게 인사를 전했다. 


          

“조심히 가. 이렇게 헤어지기 아쉽다.”

“우리 한국이든, 러시아에서든 아니면 다른 나라도 좋아. 어디선가에서 꼭 다시 만나.”     

모스크바 역에 다다른 열차는 큰 소리를 낸 채 멈췄고 다들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원은 짐을 정리하다 말고는 분주한 열차 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짧았던 7박 8일 횡단열차의 순간은 인생에 방점으로 찍힐 만큼 특별한 기억이 되어 버렸다.       


    

“이번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진짜 특색 있었다.”

“퇴사할 만큼 가치 있었어?”

“응. 너는? 합격한 회사 포기할 만큼이었어?”

“당연하지.”     


너무 소중하고 귀하면 외려 외면하게 되는데. 두고두고 이 추억으로 또 앞으로의 날들을 살아내기 위해 서명 받은 태극기를 각자의 방에 걸어두겠단 다짐과 함께 지원과 보라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태극기를 가방에 고이 넣고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차례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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