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잠이 깨어 시간 확인하기를 세 번, 아슬아슬했다. 겨우 성공이다.
2023년 1월 1일 새벽 5시. 야행성인 내가 아침형 인간이 되어 보겠노라 선언하고는 바짝 긴장하여 온밤을 설쳤지만 결국 나는 해냈다. 이빨을 닦고 상쾌한 치약 냄새가 입안을 감싸니 ‘시작이 반이다’라는 기가 막힌 문구가 떠올랐다. 절로 웃음이 났다.
겨울의 새벽은 깊은 해저를 걷는 느낌이다. 오로지 나만이 눈을 뜨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잠옷 위에 두꺼운 스웨터만 걸치고 식탁에 앉으니, 마룻바닥에서 전해오는 온돌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발바닥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진한 초콜릿 향이 매력적인 고디바 커피를 한 잔 들고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제야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니 ‘이제 뭘 해야 하지?, 뭐부터 해야 하지?’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먼저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앞당겨 시작해 보기로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인스타그램에 1일 1 피드를 올리기 시작했다. 취미가 습관이 되도록 피드에 답글을 달고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찾아 친구 맺기를 신청했다. 처음 만나는 매체, 인스타그램이라는 작은 프레임 속에는 질투의 대상이 참 많다.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선망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 나를 보면 얼른 붙잡아 주어야 한다.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자며 졸린 눈을 비벼 일어났는데 허망하게 남의 것이나 탐내고 부러워하며 시간을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컴퓨터를 켜고 온라인대학의 강의 하나를 틀었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모든 계획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에 빠져서 열심히 버킷리스트를 쓰고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빼곡히 적었었는데 올해는 강의에서 배운 대로 ‘WHY’라는 키워드에 맞춰 생각을 정리하고 목표부터 설정했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로 수익화를 만들어 경제적 독립의 꿈을 이룬다.’
다이어리 맨 앞에 적어놓은 한 줄 목표가 나를 설레게 했다. 구체적인 방법은 찾는 중이지만 동기는 확실했다.
내 꿈은 내 남편의 무게를 나눠지는 것!
18년 동안 혼자서 지켜온 가장의 책임감을 함께 나누어지고 100살까지 사랑하며 늙어가는 것!
언젠가부터 오빠의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넓은 등 뒤에 숨어 나는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고 살았다. 이제는 어깨를 나란히 걸어가고 싶다. 가끔은 내 어깨에 기대어 쉴 수 있게도 해주고 싶다.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새 다이어리에 내 눈물방울의 흔적까지 남았다.
‘잊지 말아야지….’
눈물방울에 테두리를 그리고 날짜와 시간도 적어 넣었다. 혹시나 꺾이는 마음이 들 때 오늘의 다짐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왜 이 일을 하고 싶은 거지, 하는 생각만으로 목구멍은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사연 많은 여자인 양 눈물을 훔쳤다. 많이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빠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크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많이 벌어서 오빠 통장에 플렉스 해줄게.’
새해 첫날부터 울다가 웃다가 항문에 털이 날지도 모르겠다고 혼잣말하며 씩씩하게 다시 펜을 들었다.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혼자 나가는 것이라 성격대로 모든 변수를 짐작해 보고 플랜 A와 B를 나누어 꼼꼼하게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3개월이 지나고 있다. 새벽 기상과 함께 시작한 운동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를 쓰며 운동화를 신고 나간다.
처음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1시간을 걷기만 했는데 이제는 30분을 뛸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퍼스널 브랜딩 하는 온라인 강의를 통해 조금 더 자신감을 찾았다. 한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매일 ‘이게 맞나?’라는 의심을 버릴 수 없지만 그때마다 내 다이어리 한쪽에 그려진 눈물자국을 꺼내 본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의 희로애락을 들으며 나의 지난했던 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겸손해지기도 했다. 그녀들이야말로 진정 꺾이지 않는 마음을 지닌 여전사들 같았다.
돌다리도 두들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분에 세상에 처음 나와 좋은 사람들을 빨리 만났다. 이 또한 감사할 일 아닌가. 같은 뜻을 품은 사람들과 거인의 발자국처럼 크게 성장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내게 주어진 금쪽같은 2시간은 삶에 대한 태도를 180도 변화시켰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꽤 괜찮은 엄마였음을 깨달으며 자신감을 회복했다. 자연스럽게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상의 변화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니 아이들을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며칠 전에는 범이와 챗GPT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범아, 챗GPT 써봤어?”
“응”
“어때? 나는 아직 안 써 봤는데 아빠는 매일 시를 써달라며 대화하더라.”
범이는 빅데이터와 스포츠 에이전시에 관심이 많다.
“섬세한 질문에서 아직은 버벅거리는데 좋은 질문을 어떻게 깊이 있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해요. 또 엄청난 양의 데이터에서 필요한 것을 잘 선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겠더라고요.”
숙제했어?, 학원에 늦지 마, 언제 올 거야?, 심문 같은 질문만 했을 때와 상반되는 대답이었다. 나도 아이들도 이런 작은 변화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용기 내어 다른 방향으로 기꺼이 걷고 있는 나에게 오늘은 온 마음을 다해 칭찬해 주고 싶다.
김보현, 넌 꼭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