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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키 Jan 02. 2024

#23년 마지막 날 우리의 풍경

어쩐 일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냅다 치워 창고로 보냈고, 열흘도 남지 않은 가족여행의 일정 짜기는 아직도 마무리를 짓지 못해 진행 중이며, 엄마를 닮은 아들은 멋 부리다가 얼어 죽는다는 말을 실천하며 감기에 걸렸다. 남편은 휴일 시작부터 ‘약국 찾아 삼만리’ 중이고 오랜만에 온 가족이 왔다 갔다 하는 집에만 있으려니 정신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쌓이고 쌓인 물건들이라 결론을 짓고 이를 처분하기 위해 눈동자를 여기저기로 분주하게 굴려본다. 두 팔을 걷어 올리고 범이 방의 구조를 바꾸어 옷걸이로 변해버린 책상을 말끔히 정리했다. 어느새 커서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빠져나갈 수 없는 고3 타이틀을 달아버린 아들을 위해  난장판이었던 책상을 정리해서 선물로 안겨 주는 센스를 발휘했다. 기말고사가 끝났다고 쉬고, 학원이 방학이라고 쉬고, ‘어디까지 하나 보자’라는 검은 속내를 꾹꾹 눌러가며 내버려 두니 손에 꼭 쥔 작은 전자기계는 언제 터져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상태를 유지하며 하루 종일 소파 아니면 침대와 사투 중인 딸들. 식탁에서 먹으라는 내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침대 위, 소파 위에서 음식을 먹고 흘린 자국들은 세계지도를 그려 놓은 수준이다.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내고 꼭꼭 숨겨 놓은 ‘과자봉지 찾기’를 시작하며 늘 짝이 맞지 않던 양말을 몇 개 발견하니 ‘보물찾기’ 도미노에 당첨되는 행운을 거머쥔 것 마냥  화는 절정에 달했다. 킨텍스 어느 약국까지 가서 사 온 감기약과 한 손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종의 뜰 자몽에이드’를 들고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서야 심통 났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역시 오빠 최고!”를 외치며 냉큼 받아 들어 길게 빨아서 목구멍으로 넘기니 뱃속까지 논스톱으로 내려가는 자몽의 알싸한 맛이 온몸에 퍼진다. 언제 몸을 일으켜 세웠을까?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나타난 나연이가 자몽 한 조각을 입에 쏙 넣었다.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미운 일곱 살도 아니고 ‘아 진짜 언제 사람 되는 거지?’ 자몽을 들고 돌아서서 내 자리에 앉았다.

 어제저녁 늦게까지 적다가 놔둔 다이어리가 펼쳐져 있다. 욕심 많은 성격답게 쭉 늘어놓은 새해 다짐들을 보니 가슴이 턱 막혀왔다. 희한하게 저녁에 쓰고 아침에 읽어보면 남은 글자 수보다 지워지는 글자 수가 훨씬 많다. 지금도 같은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새해에는 더 단순해질 것. 생각을 줄일 것, 그냥 행동할 것, 매일 일기를 쓸 것, 내 아이들에게도 매일 일기를 쓰게 할 것, 그날의 행복만 바라볼 것, 그날의 만남에 감사할 것, 자꾸 늘어나는 이 리스트를 지금 당장 멈출 것.” 컴퓨터 앞에 붙어 있는 작은 메모를 소리 내서 읽었다. 자꾸만 늘어나는 새해목표 때문에 며칠 전 정리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았었다. 마지막 남은 자몽 한 개를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내년을 위해 써 내려가던 목록들을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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