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만난 인도 ①
‘탁탁탁’ 그리고 ‘모든 요일의 여행’.
며칠 전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제목이 맘에 들어 이번 여행에 들고 갈 요량으로 아껴두었던 책이다. 여행의 마지막 준비물을 위해 도서관에 들렀다.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두고 떠나는 먼 길은.
3일 전 도착하신 부모님이 앞으로 열흘 동안 4남매를 돌봐 주시기로 했다. 며칠을 준비하고 챙겼는데도 무언가 빠진 기분이어서 아이들을 불러 신신당부했다. 하루가 멀게 도착하는 택배들 때문에 무게를 맞추느라 애를 먹었지만, 대체로 준비는 순조로웠다.
드디어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남편의 오지랖으로 여행길의 내 물건은 달랑 옷 세 벌, 쪼리, 노트북이 전부가 되어 짜증 났지만,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낯선 땅의 두려움마저 설레임으로 바뀌어 갔다.
“출발했어?”
“응. 택시 안이야. 공항으로 가고 있어.”
우리나라와 3시간 반 시차가 있는 인도에서 새벽부터 걸려 온 전화기 너머로 잠이 덜 깬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꼭 나보다 먼저 도착해서 있어야 해. 꼭!”
어젯밤부터 몇 번을 말했는지 남편은 바로 보이는 곳에 서 있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수속을 빠르게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나 여유가 생겼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다가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제 빌려온 책을 꺼냈다. 책 제목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번 여행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해답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저자의 경험을 빗대어 소박하게 풀어낸 이야기는 따뜻했다. 9시간의 긴 비행 동안 좋은 친구가 되겠구나, 마음이 든든했다.
잠시 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사람들이 차례차례 줄을 서고 나도 그 끝에 서서 따라 들어갔다. 영화 두 편을 보고 책도 마저 다 읽고 나니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벨트 경고 등이 깜박거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뿌연 인도의 하늘이 도착을 알려주고 있었다. 호불호가 확실히 갈린다는 인도는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낯선 땅이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평생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더니 지금 나는 어쩌다 보니 인도 상공이었다. 서서히 비행기 고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덜컹’ 드디어 착륙. 자리에서 일어선 사람들이 분주하게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도 가방을 메고 여권과 비자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사람들 따라 무사히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빨리 나왔네.”
“그래? 그냥 사람들 따라 나오다 보니 통과!”
“집까지 얼마나 걸려?”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1시간 정도 차로 이동하여 아파트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맛있는 냄새가 종일 굶었던 식욕을 자극했다. 칼칼한 짬뽕 탕, 탕수육에 샐러드까지 생각지도 못한 메뉴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영상통화로만 인사를 나누었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몇 달 동안 남편과 같이 동고동락한 손님들까지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처음 만났는데 불편하지 않은 그들의 친절은 인도에서의 첫인상으로 오래 기억되었다. 한국은 새벽을 넘긴 시간이라 부모님과 아이들에게 잘 도착했다는 짧은 문자만 남긴 후 잠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아침 7시 30분! 한국은 11시다. 대체 얼마나 잔 거야? 옆자리 남편도 내 뒤척거림에 눈을 떴다.
“굿모닝 여보! 안 불편했어?”
“잘 잤어. 나 완전히 기절했었나 봐.”
어젯밤 침대에 누워 아이들 이야기를 나눈 기억까지는 나는데, 대체 언제 잠들었을까?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 여유롭게 아침을 맞으니 그제야 인도의 첫날이 실감 났다. 늘 시간에 쫓기듯 살아 온 나는 느리게 흐르는 인도의 시간이 낯설었다.
“사모님, 잘 주무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고땀 코마르.”
방문을 열고 나오니 한국말을 좀 배운 인도인 매니저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편의 지인들과 함께 델리에 나가보기로 했다. 집 밖으로 나오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8차선 도로가 무색하게도, 얽히고설켜 움직이는 차의 행렬을 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질서에도 질서는 있다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천하태평 3인방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했다.
움막에서 사는 사람들. 먼지투성이 흙바닥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고 노는 어린아이들.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창문에 매달려 물건을 파는 앳된 아이들까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인도는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신분제도가 있어 아파트마다 식모 방이 필수로 존재 한다는 인도의 빈부격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저들은 행복해요. 이번 생애는 이런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다음 생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태어날 거라는 믿음이 있기에 지금 누구보다 만족해요”
'저들은 지금 행복해요.'
그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더 나은 삶을 넘보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나는 보장되지 않은 미래의 행복을 희망하며 매일 육신이 고달프게 움직이고 있는데?
차와 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뚫어 드디어 예쁜 카페촌에 도착했다. 유럽식 레스토랑과 테라스가 멋진 카페촌은 원래 군인 막사였다. 방금 지나쳐 온 길거리 삶과 전혀 다른 풍경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카스트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확인하고도 인도는 가는 곳곳마다 다채로운 매력으로 나를 흥분시켰다.
델리 시내에서 맛있는 점심을 사 먹고 관광도 좀 한 후 올드델리 안에 있는 티벳탄콜로니까지 들러 사람들로 넘치는 시장 구경을 했다. 먼지와 소음 사람에 치여 고단한 몸을 끌고 들어오는 길에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남편은 타고난 사회성으로 그들과 친구가 되어 있었고 ‘마이 와이프’라고 소개하니 인스타에서 봤다며 내게도 과한 친절을 베푼다. ‘위아더 월드’인 남편 성격은 한국에서는 ‘오지랖’이라 정리했는데 이곳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며 대환영을 받고 있었다.
웃기는 건 오지랖이야말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편의 성격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정작 본인은 잘 모른다는 사실이 더 큰 상실감을 느끼는 이유다.
“오빠는 스페셜이 없어? 왜 맨날 모두에게 과잉 친절한 건데?!”
“모두가 오빠 같은 마음은 아니라고 했지? 상대방이 나빠서가 아니라 적당 선이 있어야 상처도 덜 받는 거라고. 내가 100번도 더 말했었잖아!!”
신혼 때부터 줄기차게 말했지만 어디 타고난 성격이 금방 고쳐지겠는가.
계속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싸우기밖에 더 하겠나 싶어 참다가도 서운함이 몰려왔다. 이후 아이가 태어나고 좀 덜 하는가 싶어 신경 안 쓰려고 애쓰며 살아왔다. 그런데 또다시 이곳에서 황당한 사건이 나를 그때의 악몽 속으로 데려갔다.
카페에 앉아 한국에서부터 의논했던 여행 일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우리 누구랑 같이 가?”
“영희도 같이 가야지.”
“....?”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물론 가이드가 필요한 일정이다. 20년 가이드 생활을 했으니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은 없다. 그렇지만 왜 하필 그녀지? 사업 파트너가 나랑 동갑 그것도 여자라는 조건이 몇 달 동안 내 신경을 긁고 있다는 걸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집에 가자.”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왜, 뭐가 문제냐’는 듯한 저 빌어먹을 표정을 보고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 분노를 토해내기 전에.
공항에도 같이 나와 당황하게 만들더니 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나이가 들면 눈치도 나이를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약이 올라서인지 아까 먹었던 저녁이 배를 쿡쿡 찔렀다. 욱하는 성격이 몸으로 신호를 보내는데도 정작 치밀은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