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 에너지를 채울 줄 모르는 존재였다
내가 스스로 에너지를 채울 줄 모르는 존재이며, 그간 모든 것을 타인에게 기대왔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책을 출간한 에세이스트, 10년 가까이 에디터로써 주간지와 디지털 콘텐츠를 만들어온 (지금은)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아로(ahro)의 조향사이자 대표. 여기까지가 나를 소개할 때 쓰는 표현들이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어떤 것은 부각시키고 어떤 것은 제외하기도 한다. 어쩐지 내 소개를 하기 위해 필요한 문장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만 같다.
요즘은 ‘n잡러’라 불리며 나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내 주변만 해도 여럿이다.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주말에는 외주 책 작업을 하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사람, 본인의 스튜디오를 꾸리면서 동시에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사람, 시를 쓰는 시인이자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한 사람….
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각자 크고 작은 콘텐츠 채널을 꾸려나가고 있지 않는가.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퇴근 후에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우는 사람도 꽤 많다.
나는 이런 흐름이 반갑다.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 이런 말들에 스트레스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약한 내가 싫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괜찮은 결과물 하나 만들지 못하고 인생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그런 괴로움과 두려움이 다양한 방식으로 내 어린시절을 좀먹었다.
그런 내가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주간지 에디터가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이것저것에 호기심이 많은 성향은 매주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쓰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유행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콘텐츠를 계속 쏟아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약한 집중력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나 자체로 비교적 유리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10년을 보내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는 노력해볼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회사를 벗어나 혼자서 글을 쓰고 내 일을 꾸리면서, 나는 급작스럽게 나 자신에 대해 여러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스스로 에너지를 채울 줄 모르는 존재이며, 그간 모든 것을 타인에게 기대왔다는 것이었다. 내가 나에게 '잘했다'고 인정해주는 일, '멋지다'고 칭찬해주는 일,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일, 그런 게 어색했다. 불편했고, 뭔가 우스꽝스러워보일까 두려웠다. 오히려 가깝다는 이유로 나는 나 자신을 더 소홀하고 무심하게 대해 왔음을 알게 됐다.
더 많은 즐거움을 찾기 위해 더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치는 삶. 나는 내 삶이 그런 모양인 것이 좋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다양한 일을 하면 성취와 실패의 기회가 동시에 늘어나니까. 외부의 인정과 칭찬으로는 결코 나를 충분히 충전할 수 없다. 혼자 내 일을 시작하면서 맨땅에 헤딩하느라 이마가 깨지고 연이은 실수에 무릎이 깨질 때, 결국 가장 먼저 나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 당황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나에게 없는 면이기 때문에,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도 몰랐다. 하지만 요즘은 자기 자신이 잘한 일을 먼저 얘기하는 사람들이 귀엽다. 그 말을 들으면 “나도, 나도!” 하면서 내가 이룬 소소한 일들을 꺼내놓는다. 내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행복이 셀프인 것처럼 칭찬도 셀프로 해야 하니까.
이제껏 나는 나에게 모질게 굴었다. 쉽게 평가절하하고, 아무렇지 않게 비난했다. 칭찬해주는 것도, 인정해주는 것도, 이해해주는 것도, 그래서 결국 사랑해주는 것에도 인색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걸 깨달아가는 과정이자 흔적이다.
물론, 사람은 뭔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단번에 짠! 하고 변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칭찬하기 위해 거울 앞에서 “그래, 나 정도면 괜찮잖아?” 라며 머쓱한 얼굴로 다정한 응원의 말을 건넨다. 너무도 거대하게만 느껴지는 과제 앞에서는 "한 번에 하나씩, 한 번에 하나씩"이라고 되뇌이며 내 손끝, 내 발끝에 집중해본다. 작은 것이라도 뭔가를 성취하면 충분히 기뻐하는 시간을 갖는다. 좋은 일이 생기면 꼭 친구와 가족들을 불러 축배를 들고, 그들이 건네는 칭찬과 축하를 술잔에 함께 받아 마신다. 그렇게 내가 나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책 한권을 다 쓰고 나서도 여전히, 나는 그 과정 속에 있다. 이 말은 방금 책을 펼친 여러분에겐 조금 기운 빠지는 소리일까?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인정하고 긍정하는 시간이 넉넉하게 필요하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에 자연스레 공감하는 과정에서, 여러분 또한 그런 시간을 충분히 가졌으면 한다. 다른 사람을 아끼는 만큼 자기 자신도 아낄 수 있기를, 자신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