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케 칸의 죽음
요추는 해결방안도 내놓았다. 그는 ‘형제애’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전쟁 대신 칸끼리의 직접 대화를 제안했다. 뭉케 칸을 찾아가 일 대 일 담판을 지으라는 조언이었다. 그들 사이는 어쨌든 형제였다. 피가 물보다 진한 점을 이용하라. 쿠빌라이는 형을 찾아가 우선 머리부터 숙였다.
뭉케는 동생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겉으로 평화를 되찾았지만 내면은 여전히 끓고 있었다. 뭉케가 남송 원정 초기 쿠빌라이를 배제시킨 이유다. 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전황은 어쩔 수 없이 쿠빌라이를 소환하게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유사한 기후의 대리(중국 운남성 서부) 원정에서 성공을 거두어 주목을 받았다. 누가 뭐래도 몽골 내에서는 최고의 중국 전문가였다. 쿠빌라이는 대리 경영에 중국 방식을 도입했다.
쿠빌라이는 먼저 대리 왕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왕국의 실권자 고태상이 이를 거부했다. 그는 왕국의 안위보다 자신의 권력을 먼저 생각했다. 몽골 치세가 되면 권력을 잃을 게 뻔했다.
고태상은 금사강(金沙江)에 병력을 집결시켜 두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깊은 강심(江心)과 빠른 물살에 의지하기 위해서였다. 몽골군은 물을 두려워한다고 들었다. 쿠빌라이는 양가죽 뗏목을 만들어 한 밤중에 강을 건넜다. 허를 찌르는 전격 작전이었다. 대리군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대리의 수도를 정복한 후 약탈을 최소화했다. 할아버지 칭기즈칸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쿠빌라이는 대리, 섬서, 하남을 다스리기 위해 위구르인 염희헌을 선무사로 보냈다.
염희언의 첫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주민들 위에 군림해온 역술인부터 처단했다. 주민들의 숭배대상이 되어 온 자였다. 그가 처단했는데도 아무 일 없자 민심이 확 돌아섰다.
이탈리아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1452~1498년)는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의 개혁 수도사였다. 프랑스의 침략을 ‘신의 뜻’이라고 해석 신정정치를 펼쳤다.
그는 “당신이 정말 예언자라면 불 속에서도 살아 있을 것 아니냐?”는 반대파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 불의 심판을 받게 됐다. 막상 불을 피워놓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그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결국 성난 군중들에 의해 엉터리 ‘신의 사도’로 몰려 진짜로 화형을 당했다. 그는 불 속에서 죽었고, 정작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유학에 능해 염맹자(廉孟子)라고 불린 염희언은 당시 겨우 스무 살이었다. 쿠빌라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평가했다. 대리에서의 성공을 치하한 뭉케 칸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남경과 서안(西安) 가운데 하나를 영지로 주겠다고 제안했다.
서안은 한(漢)과 수(隨), 당(唐)의 수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지만 당시 남경보단 인구가 적었다. 당연히 쿠빌라이가 남경을 택할 것으로 예상했다. 지배자는 세수 즉 돈이 많은 곳을 원하기 마련이다.
쿠빌라이의 선택은 서안이었다. 흡족해진 칸은 하남 땅을 별도로 선물했다. ‘동생은 소문보다 욕심이 적군’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쿠빌라이는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을 덤으로 챙겼다.
이는 쿠빌라이가 치밀한 계산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남경 지역은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땅에 소금기가 많아 농사에 부적합했다. 서안은 비옥했고 오랜 전략 요충지인 관중(關中)을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유비와 조조, 손권이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던 곳이다.
당장은 남경이었지만 멀리 보면 서안이었다. ‘쿠빌라이 칸’의 저자 모리스 모사비는 이를 두고 ‘탁월한 혜안’이라고 평가했다.
쿠빌라이의 엉뚱한 발상은 이후에도 종종 주변을 놀라게 했다. 쿠빌라이는 1259년 여름 군대의 야영지로 한족 군벌 엄충제의 영내를 선택했다. 엄충제는 산동 지역의 맹주였다. 반 몽골 정서가 강한 군벌이었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찾아들어간 셈이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엄충제의 세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엄충제가 가만있을 리 없었다. 주변에서 두 세력이 반 듯 충돌할 것으로 보고 결과를 주목했다. 쿠빌라이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은 어린 시절 타이치우드 족에게 쫓기면서 밤에 몰래 그들의 본거지를 숨어드는 대담함을 보였다. 역시 피는 속이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엄충제 쪽은 조용했다. 한 판 큰 싸움을 기대했던 주변은 실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후 벌어진 일이다. 자살행위처럼 보인 쿠빌라이의 여름 야영지 선택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몽골 조정의 권력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워 온 한족 군벌들이 일제히 쿠빌라이 편으로 쏠렸다.
어찌된 일일까?
군벌들은 정치가다. 어느 편에 붙으면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면 즉시 도태된다. 그들은 쿠빌라이의 행동에서 배짱과 결단력을 보았다. 의지할 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일은 쿠빌라이의 역사적인 양자강 도강 후에도 일어났다. 이런 일들이 단지 운이라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야 말로 지도자의 자질이다. 쿠빌라이의 양자강 도강은 철저한 계산력과 배짱이 결합된 승부수였다.
중국의 역사에선 남과 북이 싸우면 늘 북쪽이 이겼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패배(敗北)다. 북쪽에게 졌다는 의미다. 남쪽에 더 많은 인구가 살았지만 북쪽에 비해 기질적으로 유약했다. 농사짓기 편하고 풍요로운 환경이 만든 역설이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에 더 오래 버틴 쪽은 남쪽이었다. 거대한 자연의 방벽 양자강 덕분이었다. 외적이란 주로 유목민 기병대를 말했다. 만리장성을 쉽게 뛰어 넘은 그들의 말은 양자강에 막혀 기동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세계 최강의 몽골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2대 칸의 아들 쿠추는 대규모 남송 원정을 단행한 적 있었다. 조부 칭기즈칸의 군사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대군이었다. 하지만 자연의 위력에 막혀 실패했다. 양자강이라는 거대한 ‘물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양자강의 위세는 몽골군에게 바다나 다름없었다.
강을 건너더라도 단단한 성벽과 깊은 해자가 버티고 있었다. 날씨와 모기는 더욱 치명적이었다. 작은 모기는 거대한 기마대 사이를 유유히 헤집고 다녔다. 전설의 기마부대는 전투가 아닌 질병에 고전하다가 결국 물러서야 했다.
남송의 수도 항주의 당시 인구는 150만여 명. 유럽에서 가장 활발했던 항구도시 베네치아의 인구가 고작 10만 명이던 시절이다. 항주는 풍부한 물산을 지녔지만 주민의 투쟁심은 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보다 금과 비단을 주어 적을 달래는 편을 더 좋아했다.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는 심리적 무방비 상태였다.
뭉케는 원정 도중 쿠빌라이를 다시 전장의 중심으로 불러들였다. 그의 본대가 고전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군사 운용 방식은 ‘3군단’ 체제다. 황제 뭉케는 중앙을 맡았다. 서쪽은 명장 수보타이의 아들 우랑카다이. 쿠빌라이에게는 동부전선이 주어졌다.
유능한 군주 뭉케는 잠시도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참모들은 남송의 무더운 날씨에 적응하면서 천천히 진군하자고 요청했다. 뭉케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뭉케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늘 자신감이 흘러 넘쳤다. 뛰어난 자질을 갖춘 리더가 실패하는 이유 가운데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아랫사람들의 형편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인 경우가 있다. 뭉케의 경우가 그랬다.
6월 들면서 장마에 폭풍우까지 겹쳤다. 뭉케가 서두른 반면 쿠빌라이는 서서히 나아갔다. 느리지만 단단했다. 남쪽에서 성공을 거둔 우랑카다이는 동북 방면을 치고 올라왔다. 두 군단은 양자강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중대한 변수가 발생했다. 뭉케의 본진에 전염병이 급습했다. 화살촉보다 더 날카로운 공격력을 지닌 질병이었다. 최강의 몽골기병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바바’라는 이름의 전염병은 콜레라나 이질로 짐작된다. 페스트일 수도 있다. 병원균은 황제의 몸속에도 침입했다. 황제라고 예외일 순 없었다. 1259년 8월 11일 뭉케는 잠자리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칸의 자리는 다시 비워졌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정치 사극이 펼쳐지려는 순간이었다. 세계사를 바꿔 논 격동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