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양자강
최고의 권력 자리를 놓고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려 했다. 당대 지상에서 가장 막강한 파워를 가진 자리였다. 정해진 각본은 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쿠빌라이가 황제 서거 소식을 접한 것은 젖형제 무게로부터다. 쿠빌라이는 무게 어머니의 젖을 함께 먹고 자랐다. 몽골에서 각별한 인연으로 여겨지는 사이다. 마침 무게는 칸의 본진에 속해 있었다. 쿠빌라이에게는 행운이었다. 무게는 이 중요한 급보를 잽싸게 쿠빌라이에게 알려왔다.
이는 카이사르의 경우와 묘하게 겹쳐지는 대목이다. 로마 원로원은 전방에 나가있던 카이사르를 묶어두기 위해 ‘최종 권고’를 결의했다. 일종의 비상계엄이었다. 카이사르를 한 방에 무장 해제시킬 수 있는 초강력 조치였다.
카이사르가 조금만 더 늦게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었다. 전방에 주둔해 있던 카이사르는 밀사의 재빠른 행동으로 원로원의 비상조치 내용을 미리 입수했다. 그 결과 한발 먼저 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유능한 이들 두 전략가의 공통점은 정보전에도 능하다는 사실이다.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조금 늦게 뭉케 칸의 죽음을 알았더라면 쿠빌라이의 향후 대응에 차질을 빚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랬듯 쿠빌라이는 권력 중심부에 늘 안테나를 꽂아 두고 있었다. 인편 외에는 별다른 통신 수단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편지의 말미에 무게는 쿠빌라이에게 즉시 북쪽으로 올라오라고 요청했다. 북쪽이라면 몽골 본토를 의미했다. 칸이 죽었으니 곧 쿠릴타이가 열릴 것이다. 권력을 차지하려면 그 중심에 있어야 했다. 무게의 충고는 당연했다.
쿠빌라이는 참모들을 모았다. 역시나 북행(北行) 의견이 우세했다. 본토에서 권력의 향방이 결정되니 당장 그 쪽으로 가야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인척인 바아투르가 뜻밖의 건의를 했다. 바아투르는 쿠빌라이의 손위 동서다. 쿠빌라이의 부인 차비의 언니가 그의 부인이었다.
바아투르는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자는 다소 엉뚱한 주장을 내놓았다. 양자강을 건너자니, 제 정신인가. 그냥도 건너기 힘든 강을 이 중대한 판국에. 강 너머 해결할 일도 만만치 않은데다 다시 넘어오려면 시간과 전력 낭비가 상당할 것이다.
나머지 참모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당시 쿠빌라이군은 양자강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들이 직접 보고 있는 저 강은 강이라기보다 온전히 바다에 가까웠다. 강물은 바람의 유무에 따라 철석, 철석 파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편에서 보면 저 편은 아득히 멀어 보였다. 병사와 보급품이 다 건너려면 얼마나 많은 배가 필요한지 모를 지경이었다. 더구나 초원에서 자란 몽골군은 강물을 두려워했다.
유목민들은 대지에 익숙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다. 그들에게 물의 속성은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다. 아득한 강의 밑바닥에서 물귀신이 올라와 그들의 발목을 잡아끌 것 같았다. 두려움은 몽골군조차 물 앞에서 얌전해지게 만들었다.
상황은 미묘했다. 북쪽에선 막 권력의 정점을 향한 ‘왕좌의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되도록 빨리 그곳으로 가야만 했다. 강 건너편에선 우랑카다이가 몽골군을 이끌고 북상 중이었다.
그들은 습기와 더위에 막혀 고전 중이었다. 그대로 두면 적지에 고립되어 자칫 회복 불능 상태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들을 버려두면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권력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일단 권력을 가지면 누구도 욕을 하지 못한다.
우랑카다이는 명장 수보타이의 아들이다. 몽골에서 수보타이가 갖는 이름은 무거웠다. 그러나 그는 쿠빌라이와 편치 않은 사이였다. 서로 경쟁의식도 느끼고 있었다. 우랑카다이는 어느 편도 아니었지만 쿠빌라이의 편은 결코 아니었다.
원래 쿠빌라이와 우랑카다이는 양자강 남쪽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런 다음 남송의 수도 항주를 향해 진군할 예정이었다. 맹장 우랑카다이는 아쉽게도 뭉케의 편에 선 장수다. 대리원정서도 쿠빌라이와 자주 대립했다.
그가 제거되는 편이 오히려 쿠빌라이에겐 유리했다. 여차하면 자신의 반대편에 서게 될 인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라져준다면 입을 가리고 표정관리를 하면 그만이었다. 쿠빌라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 일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했다. 권력을 차지하려면 북쪽으로 가야한다. 쿠릴타이 현장에 가 있지 않으면 대권을 손에 넣을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렇다고 남쪽에 고립된 우랑카다이를 외면하면 아군의 위기를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 정도는 권력을 잡게 되면 저절로 사라질 손실이다. 권력은 복원력과 치유의 능력을 지닌 생물이다. 참모들의 의견은 대부분 말머리를 북으로 돌리자는 쪽이었다. 상식적인 판단이다.
다수가 찬성하는 방향일수록 위험도는 줄어든다. 그러나 상식의 대가는 늘 상식적 결과에 머문다. 지도자에게는 종종 상식을 뒤집어야할 때가 있다. 그 때가 지금인가. 쿠빌라이는 몇 번이고 자문해보았다. 이번 선택에 자신과 제국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쿠빌라이는 1259년 9월 중순 양자강 북쪽 강변에 서있었다. 강물의 흐름은 도도했다. 중국인들을 먹여 살려온 강이었다. 예부터 이곳은 군사 요충지였다. 무창, 한양, 한구 등 세 도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합쳐져 무한(武漢·우한)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서에서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양자강의 딱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황학루에서 내려다보는 양자강은 느리지만 거대했다. 무한의 서쪽에 위치한 황학루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어느 주점에 허름한 노인이 찾아와 공짜로 술을 얻어 마시려 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은 싫다고 하지 않고 선뜻 술을 내주었다. 그는 몇 번이나 와서 공술을 얻어마셨다. 그 때마다 주인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다.
어느 날 돈이 없다며 술값 대신 벽에 노란 두루미를 그려주고 사라졌다. 이후 술손님 가운데 누군가 노래를 부르면 벽에 그려진 두루미가 훨훨 춤을 추었다. 이 진기한 장면을 구경하려고 손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훗날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가 피리를 꺼내 불자 두루미가 벽에서 툭하고 튀어나왔다. 노인은 두루미를 타고 휘~ 날아가 버렸다. 알고 보니 그는 신선이었다.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는 황학루라는 시에서 “옛 사람은 벌써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이곳엔 공연히 황학루만 남아 있네. 한 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 동안 한가롭네”라고 노래했다.
인간의 힘으로 저 도도함에 맞설 수 있을까.
강물을 바라보는 쿠빌라이의 마음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여름 장마와 늦은 폭풍우가 합쳐진 강물은 잔뜩 성난 상태였다. 조부 칭기즈칸은 남송을 정복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양자강 이남은 몽골과 상극이었다.
몽골 고원은 춥고 광활했다. 양자강 이남은 무덥고 촘촘했다. 몽골 고원은 말이 달리기 수월했다. 양자강 이남은 사람과 건물로 인해 장애가 많았다. 양자강 이남은 예로부터 중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 땅의 풍요는 인정받았으나 그 땅의 혈통은 오랑캐라며 배제됐다.
북은 늘 남을 수탈했다. 그러고도 인정을 베푸는 데는 인색했다. 현재도 양자강 하구의 삼각주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하지만 그들의 부와 상관없이 중원의 남쪽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기껏 남만(南蠻)으로 불린 지역이다.
몽골은 남만의 부를 꿈꿔왔다. 이는 칭기즈칸의 꿈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이 먼저였다. 강을 넘자는 일부 참모들의 생각이 옳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권력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 쿠릴타이에서 선출된 칸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도 있다.
강의 위용을 목도한 몽골 장군들은 거듭 도강을 만류했다. 우기로 불어난 물은 몽골족에겐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그들 눈앞에서 금세라도 범람할 듯 넘실거렸다. 몽골군은 물에 익숙하지 않았다. 번민의 시간이 흘러갔다. 의견은 다양하게 분출될 수 있으나 결정은 지도자의 몫이었다.
때를 헤아리는 일은 개인이나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치게 된다. 지금은 한시가 아쉬운 상황이다. 여기서 우물쭈물할 바엔 차라리 북쪽으로 올라가는 편이 낫다.
마침내 쿠빌라이는 결정했다. 양자강을 건너기로. 그 말을 전해 들은 참모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도 설마 싶었다. 그러나 한 번 내린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한번 결심하면 물러서지 않는 쿠빌라이였다.
쿠빌라이의 명령이 떨어졌다. 몽골군은 9월 29일 양자강을 건넜다. 군사들은 저마다 몸에 부적을 붙였다. 두려움은 접착제 같다. 뇌 세표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말 위에선 바람처럼 용맹한 그들이지만 물에선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양자강 도강은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몽골군이 도강은 내부에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남송 정부에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허를 찔린 남송군은 허둥댔다. 도강을 몽골군의 자살행위로 보았기에 그럴 만 했다.
남송의 수군은 당대 세계 최강이었다. 함선이나 수군의 수에서 13세기 어느 나라도 남송과 견줄 수 없었다. 그들의 해군력은 압도적이었다. 남송뿐 아니라 양자강 이남에 세운 나라들은 예부터 수군이 강했다. 오나라 수군의 위력은 조조마저 벌벌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쿠빌라이의 도강을 전혀 예상 못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어떻게 양자강을 건넌단 말인가. 더구나 그들의 함선이 강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전시 상황에서. 상류 쪽으로 돌아서 오겠지. 한 반 년쯤 걸리려나. 상식적 판단이 애써 그들을 안심시켰다. 쿠빌라이는 그들의 상식을 깨트렸다.
몽골군의 전격 도강에 남송 수군은 제대로 대처를 못했다. 몽골군은 강의 남쪽 연안에 진지를 구축했다. 남송군은 동요했다. 놀란 쪽은 남송 정부뿐 아니었다. 북쪽에서 쿠릴타이를 준비하던 경쟁자 아릭 부케도 마찬가지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쿠빌라이가 그런 일을 벌일 리 없었다.
‘형은 칸의 자리를 포기하는군.’
아릭 부케는 형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소식을 접한 순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칸을 위한 싸움은 자신이 유리해졌다고 판단했다.
쿠빌라이군은 몽골과 한족(漢族) 연합부대였다. 몽골 참모들과 달리 한족 참모 중 일부는 쿠빌라이의 의중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왜 양자강을 건너야만 했는지.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저 사람은 몽골족이지만 머릿속은 한족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유목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눈앞의 실익부터 쫓는다. 저기 보이는 사슴을 쫓지 않으면 가족들이 저녁을 굶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사슴이 달려가는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다.’
카이사르의 루비콘 도강은 순전히 실익 때문이었다. 강을 건너지 않으면 그 자신이 파멸할 상황이었다. 반대로 쿠빌라이는 명분을 얻기 위해 강을 건넜다.
실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몽골고원으로 한시바삐 가야만 했다. 유목민으로선 쉽게 내리기 힘든 결정이었다.
양자강은 초원과 바다의 중간에 위치한다. 장장 6300㎞를 흐르는 장강(長江)이다. 몽골군의 유럽 원정과 맞먹는 거리다. 숱한 역사를 만든 무대였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러와 적벽에서 조조를 이긴 곳도 양자강이다. 양자강은 청두, 충칭, 난징, 상하이 등 큰 도시를 품고 있다. 쿠빌라이가 강을 건넌 곳은 우한(武漢) 지역이었다. 정작 신기한 일은 도강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