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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31.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20


왕좌의 게임     

 

묘한 일이었다. 몽골군의 양자강은 쿠빌라이의 도박이었다. 그런데 이후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속속 벌어졌다. 마치 조부 칭기즈칸의 ‘발주나의 맹약’ 당시를 연상시키는 일들이었다. 

전략가 쿠빌라이조차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도강의 명분은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장수나 병사들에겐 매우 감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들도 알았다. 쿠빌라이가 칸이 되기 위해선 북쪽으로 갔어야 됐음을. 그런데 대권을 포기하고 전우를 구하기 위해 강을 건넜다. 그것이 계산된 책략에서 나온 것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보다 과정이 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 심지어 그들의 리더는 우랑카다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바다처럼 넓은 강물에 뛰어들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전장의 군사들에게 이보다 더 큰 감동적인 일은 없었다.

제 목숨 부지하기도 급급한 판국에 아군을 살리기 위해 강을 건넜다. 도강의 숨겨진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 수 없었지만 이 일은 군사들의 단순한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 도강이후 주변 정세에도 변화가 생겼다. 칭기즈칸의 ‘발주나 맹약’ 이후 불어난 세력처럼 쿠빌라이 주변에 속속 한족 군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쿠빌라이조차 예상 못한 결과였다. 

한족 군벌들의 합류를 신호로 몽골의 다른 부대도 움직였다. 쿠빌라이의 양자강 도강은 유목 DNA에 정주 문명의 골수를 결합시키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 먼저 끌린 쪽은 한족들이었다. 그들은 실리보다 명분에 익숙한 정주민족이었다. 


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유학은 특히 명분을 강조했다. 공자는 명분을 바로하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단언했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만 해도 유학은 대륙의 지배 사상이 아니었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며 유학을 경시했다. 시경과 서경은 유학의 핵심 경전이다. 

경전은 성인의 말을 기록해둔 책으로 그 안에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책을 소용없다고 배척하던 한고조 유방이었다. 그러나 건국 초기 혼란기를 거치면서 유방의 태도가 바뀌었다. 술자리서 공신들끼리 칼을 빼들고 싸움을 벌일 만큼 무질서한 모습에 질린 다음이었다. 

“유학자들이 패권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일단 다듬어진 질서 유지에는 능합니다. 유학자들에게 조정의 예의범절을 만들게 하여 시행해보면 어떨까요.” 

유방은 이런 유학자 숙손통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한 무제 때 이르자 유학은 국학으로 자리 잡았다. 유학자 동중서는 ‘천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를 만드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고 주장했다.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 입맛에 딱 맞는 말이었다. 

당나라에 이르러 유학은 잠시 불교와 도가(道家)에 밀려났다. 당이 무너지고 요(遼), 금(金) 등 외세에 나라를 빼앗기자 다시 유학이 주목받았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주자의 신유학이 떠올랐다. 

이를 주자학 또는 성리학(性理學)으로 불렀다. 성리학은 5백 년 내내 조선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알게 모르게 성리학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쿠빌라이의 휘하에는 한족 유학자들이 꽤 많았다. 쿠빌라이는 그들을 통해 중원을 지배하려면 명분을 먼저 얻어야 함을 알았다. 높은 성벽과 끈적거리는 습기로 둘러싸인 한족들의 제국을 이해하려면 유학을 배워야 했다.  

몽골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면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들은 명분을 생존에 별 소용없는 사치품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유목민의 후예 쿠빌라이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택했다. 그로인해 정주문명에 속한 한족 군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들의 지지는 몽골족을 움직이는 또 다른 소득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도미노 효과를 불러 왔다.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몽골의 동방 3왕가가 쿠빌라이 지지를 선언했다. 예상치 못한 소득의 연속이었다.       

쿠빌라이가 세력을 불리자 슬슬 눈치를 살펴오던 남송이 먼저 협상을 제안했다. 쿠빌라이는 “늦었다. 우리는 이미 양자강을 건너왔다”며 일축했다. 일대의 세력 판도가 급격히 쿠빌라이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몽골 고원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더 이상 강남(江南)에서 지체하다간 영영 대권과 멀어질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강남에 머무는 동안 경쟁자인 아릭 부케는 팔짱끼고 구경만하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아릭 부케에게 얌전히 대권을 넘겨줄 수 있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얼마 뒤 우랑카다이 군의 안전 귀환이 확인됐다. 더는 남쪽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 사이 아릭 부케는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세력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동조했다. 죽은 뭉케의 아들들 역시 아릭 부케 편을 들었다. 아릭 부케는 열심히 수도 인근에 군사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아직 병력의 수에선 쿠빌라이가 앞섰다. 그러나 군사적 정황 외에는 대부분 쿠빌라이가 불리했다. 아릭 부케는 수도를 차지했고, 지지 세력들을 주변에 거느리고 있었다.  

아릭 부케가 군대의 일부를 쿠빌라이의 핵심 거점인 개평으로 이동시켰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노린 것이다. 장기판에서 상대편 말(馬) 하나가 우군 진영으로 한 발 전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남쪽에 지체하다간 발밑의 땅이 사라질 판이었다. 쿠빌라이는 북상을 결심했다. 


쿠빌라이는 다시 양자강을 건넜다. 이번엔 남에서 북으로 옮겨 갔다. 남과 북에서 대 군단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내전의 불길한 그림자가 온 제국을 뒤덮기 시작했다. 유례없는 몽골군끼리의 내전이었다. 

아릭 부케가 묘한 견제구를 날려 왔다. 쿠빌라이를 카라코룸으로 초청한 것이다. 죽은 황제 뭉케를 애도하자는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위장된 유인책이었다. 조부 칭기즈칸은 왕칸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위험에 빠졌다. 

상대의 의도를 읽은 쿠빌라이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아릭 부케의 얕은꾀에 놀아 날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쿠빌라이와 그의 참모들은 상대의 장기판 내용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쿠빌라이가 먼저 승점을 올렸다. 쿠빌라이는 1260년 5월 개평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아릭 부케에게 한방 먹인 셈이었다. 자신의 초청을 거절하더니 설마 수도 카라코룸이 아닌 곳에서 쿠릴타이를 열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다음 달 아릭 부케도 서둘러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이로써 몽골 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대칸이 선출됐다. 이제 양측은 전쟁을 향한 외길 수순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주 선 두 열차는 서로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여전히 명분은 아릭 부케 편이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쿠빌라이의 처지를 ‘단순 반란자’로 표현했다. 그 점에선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도 마찬가지였다. 한강 다리 위에선 박정희도 당시엔 반란군이었다. 

이전 대칸들은 모두 칭기즈칸의 고향이나 카라코룸에서 선출됐다. 칭기즈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대칸 선출은 무효였다. 정통성은 지지자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킵차크 칸국의 새로운 계승자 베르케와 중앙아시아 차가다이도 아릭 부케를 지지했다. 심지어 중동의 훌레구 마저 아릭 부케 쪽에 사절을 파견했다. 

훌레구는 마음속으로 쿠빌라이를 지지했지만 따로 보험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몽골 제국 내부만 놓고 보면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그 점 역시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와 흡사했다. 


정황은 불리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선 반란군 쪽이 앞섰다. 절박함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하고 있었다. 

물러나면 모두 죽는다. 차라리 죽기 살기로 싸우자.      

쿠빌라이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칸부터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만 물러서도 물속에 처박히는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아릭 부케 진영에는 그런 절박함이 없었다. 쿠빌라이 측이 단단한 군사동맹이었다면 아릭 부케 진영은 느슨한 외교 연합이었다. 쿠빌라이는 초반부터 거칠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심리적 압박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상대의 거센 공세에 아릭 부케는 잠시 수도 카라코룸을 내주었다. 쿠빌라이는 쉽게 수도에 입성했다. 

하지만 일부 수비대만 남기고 수도에서 철군하는 실수를 범했다. 전략가인 쿠빌라이로서는 흔치 않은 잘못이었다. 수도를 다시 내준 쿠빌라이는 새로운 전술을 시도했다. 수도 봉쇄였다. 나폴레옹이 영국에게 취한 해상봉쇄와 맥을 같이하는 전략이었다.

몽골의 수도는 외부로부터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을 공급받아야 생존 가능한 구조였다. 식량 공급 차단은 이 도시의 숨통을 조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릭 부케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 수도를 버리고 일리 계곡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은 차가다이의 영토였다. 아릭 부케는 일리에서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남의 영토에서 대규모 살육을 단행하고 말았다. 몽골족은 몽골족에 대해 관대해야 한다. 범죄자의 처벌이 아니고는 몽골족은 종족을 죽여선 안 된다. 

험악한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 왕자’ 아릭 부케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민심이 차츰 아릭 부케를 떠나갔다. 그는 형인 쿠빌라이와 태생적 기질부터 달랐다. 

쿠빌라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선 목숨을 거는 승부사였다. 아릭 부케는 겉으론 사나워 보이지만 내면은 여린 인물이었다. 아릭 부케는 곧 형에게 항복의사를 전해왔다. 

역사가 라시드 앗 딘은 두 칸의 대면 장면을 이렇게 적어두었다. 쿠빌라이가 “너와 나 가운데 누가 옳으냐?”고 물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아릭 부케는 “그 때는 내가 옳았지만 지금은 형이 옳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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