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지 Apr 26. 2023

K 장녀에게

나랑 대화하기


  저는 원래 위로를 말로 잘하지 못해요. 아니 잘 하지 않아요. 말이 주는 한계를 경험하곤 해서 위로한답시고 함부로 말로 하지 못해요. 거의 그냥 옆에 있어 주는 편이죠. 그래도 오늘은 고르고 고른 말들로 한번 위로를 해보고 싶어요. 제가 위로받고 싶거든요. (본인 위주 세계관) 그러니까 그냥 위로 들으세요.


  “동생 밥 챙겨줘라!”, “엄마 아빠 없을 땐 네가 엄마 아빠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뼈에 새기도록 들은 말이에요. 네, 제가 K 장녀거든요. 너무 많이 들어서 뭐가 이상한지 알아차리지도 못한 말이었죠.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자처하는 장녀들’, ‘부모를 돌봐야 하는 의무, 동생을 돌봐야 하는 의무’, ‘한두 살 차이나도 언니(누나)는 언니(누나)’ 등등 K-장녀들은 본인들을 이렇게 정리하곤 한대요.


  뭐, 물론 가족 중에 처음 태어났기 때문에 누린 혜택도 많아요. 아무래도 처음 아이다 보니 예쁨을 독차지한 어떤 기간이 있었어요. 근데 그거 동생 태어나면서 끝났잖아요! 흥. 2년 예쁨 독차지하고 평생을 책임감 속에 살고 있는데 조금 억울하네요.


  덕분에 어려서부터 아무도 안 시켰는데 예쁨을 쟁취하고자 했다랄까요? 아무 조건 없이 귀염받는 법을 몰랐어요. 혼자 예쁨을 독차지해 본 추억이 있어서일까요? 동생이 생긴 이후론 우리가 뭔갈 잘하지 않으면 그마저 받든 예쁨도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무슨 일이든 잘 해내려 노력했죠. 못하는 일까지 잘하려고. 그 어린애가 어떻게 됐겠어요. 자기 몸무게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과 부담감을 내내 가지고 살았으니 말이에요.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마치 그 문제랑 본인이 한 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제일 가슴아파하고 해결하지 못해 안달이었어요. 동생은 ‘뭔가 심각 한 일이 생긴 것 같으니 조용히 있자.’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있는 것 같았죠. 그런 동생이 상처받지 않게 챙기기도 하고 문제도 해결하려고 했어요. 부모님이 그 문제로 마음이 아픈 것도 싫어서 중재자 역할을 척척 해내고요. 가족들이 다시 편안한 모습을 찾았을 때 비로소 우리 마음도 편안해졌어요.


  알아요. 정말 오랜 시간 이렇게 살아와서 관성처럼 원래 신경 쓰던 것을 갑자기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거요. 아마 자책을 더 심하게 할거에요. 마음이 더 편하지 않고, 더 힘들 거예요. 아마 견디지 못할 거에요. 그래서 다 내 문제처럼 고민하고 가져가는 거겠죠? 그거 하지 말라고 못 하겠어요. 저도 못 하거든요. 껄껄. 근데 이 말은 하고 싶어요.


  “어떤 순간에도 너를 완전히 잃진 말아라.”라고요. 우리를 완전히 놓아버리진 말자고요. 그 문제랑 같이 갈아 없어져 버리지 말자고요. 우리가 좋아하는 글쓰기, 책모임, 그리고 사람 만나서 노는 일, 피크닉, 음악, 운동, 꿈 이런 거 놓아버리지 말게요. 그러기엔 우리도 우리가 정말 소중하거든요. 예전부터 길러온 책임감, 성실함 덕분에 충분히 가족 문제도 살피고 나도 살필 수 있어요. 우리는 K-장녀거든요. 우리끼리라도 만나면 꼭 안아주게요. 그럼 이만 저를 위한 위로를 마쳐볼게요. 부디 평안히 자요.


  P.S 아 참! K-차녀, 장남, 차남 기타 등등의 노고도 알아요. 하지만 제가 그렇게 안 살아봐서 감히 함부로 위로의 말조차 꺼내지 못해 K-장녀 이야기만 적은 점 용서해주세요 : ) 하지만 당신이 위로가 필요할 때 상상력을 빌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헤아려 볼게요. 안되면 어쩔 수 없이 그냥 옆에 있어 줄게요.



매거진의 이전글 저울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