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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도치 Mar 26. 2023

뉴스 바깥에서, '진짜' 중국 이야기(3)

중국인에게 신분상승 사다리는?

*이 글은 <민간중국> 4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pixabay


한국인의 신분상승 사다리는 무엇일까? 최근에는 경제 위기와 그로 인한 노동조건의 다변화로 취업보다는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각종 고시가 신분상승의 사다리로 떠오른 모양새지만, 원래는'대학입시'였다. 여기에 각종 자격증 시험의 천국인 한국의 상황을 더하면 한국인의 신분상승 사다리로 '시험'이 중요하다는 것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국인의 신분상승 사다리는 무엇일까? 



여기 한 동북 노동자 집안의 눈물겨운 베이징 입성기가 있다. 저자는 2004년 경부터 알고 지낸 중국인 친구 리핑을 통해 동북 노동자의 신분상승과 몰락, 그리고 또 다른 신분상승을 시도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한 집안의 도약과 몰락은 지난했던 중국의 현대사와 궤를 같이했다. 한반도와 맞닿아 있는 중국의 최북단 지역인 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 성, 이른바 '동북 3성 지역'은 자원이 풍부해 식민지 시절에는 자원 수탈의 대상이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동북 지역은 마오쩌둥의 '노동계급의 상승'이라는 구호 아래 일제가 남긴 공업 인프라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기술 원조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노동자 지원책은 공장 노동자로서 동북 노동자들이 자부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리핑의 어머니를 제외한 할머니와 외삼촌, 이모는 모두 그 시절 공장 노동자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계획경제로 부상한 동북 지역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계획 경제 손길이 닿지 않는 남쪽의 연해 지역(홍콩, 선전, 샤먼 등 남부 지역)은 독립 후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화교 자본의 유입으로 자본주의식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계획 경제 하에서 발전한 동북 지역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덩샤오핑 시대에 이르러 정부는 개혁개방으로 정책 노선을 틀었고, 정부의 지원은 홍콩과 선전에 집중되었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경제특구 선전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동북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앙 정부는 자원이 점차 고갈되어 가던 동북 지역을 사실상 포기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길 위의 삶으로 내몰렸다. 단위 체제 하에서 건강 보험과 각종 가족 지원 정책, 그리고 정년 보장을 약속받았던 동북 노동자들은 단위로부터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리핑의 넷째 이모부는 석탄 가공 공장에서 해고되었고, 리핑의 아버지도 그러했다. 이렇게 무한정 실업 상태에 놓인 이들은 '시아깡'(직책에서 내려온 사람)이라 불렸다. 


젊은 시절에 대부분 단위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던 시아깡들은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붙여진 멸칭은 한때 국가의 경제성장에 헌신한 동북 노동자에게는 모욕적이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리핑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장 빛났던 문화혁명의 시대를 안줏거리로 삼았다. 마오 주석의 '전쟁에 대비하고, 흉작에 대비하고, 인민을 위하라'는 구호를 읊으며 홍위병 시절을 회상했다. 리핑의 사촌 동생 양양은 처음에는 그녀의 아버지가 방학을 한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공장에 출근하지 말라는 간부의 명령을 해고로 받아들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방학이 2년이 되고, 3년이 되자 아버지는 자신이 비로소 시아깡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처음 배정된 단위에서 공회(노동조합)를 만들어 어려운 노동자들을 돕는 데 앞장섰어. 누구보다 당에 충성하고, 주임으로 발탁된 뒤에도 일선 노동자들과 함께 종일 일했지. 내 당안(개인의 생애 이력)은 '홍색' 역사로 가득하지. 그럼 뭐 해. 1년 치 월급도 못 받고... 지금은 집에서 죽치면서 좌판이나 하는 걸. 다 부질없는 거야. 그렇게 몸 바쳐 일했는데 아무것도 안 남았어.

가족의 몰락은 단위에 대한 믿음이 상실로 바뀌고, 가족이 새롭게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집안 남자들이 실업자가 된 이후로 벌이는 집안 여자들의 몫이 되었다. 양양의 아버지는 만터우(중국식 빵)를 팔거나 경비 일을 하는 등 계속 생계 노동을 이어나갔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리핑 가족은 단위 체제의 붕괴 이후 단위의 유산이었던 집을 투자에 이용하였고, 여자들은 가사 노동일을 했으며, 푸순에서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며 모여 살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가장 큰 보험은 자식농사였다. 집안 어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식교육에 열을 올린 결과 리핑은 다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칭화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가족 중 가장 성공한 그는 집안의 영웅이 되었다. 3대가 노력한 결실을 맺은 셈이니 가족 모두가 리핑이 언젠가 베이징에 입성하게 되면 성공적인 신분상승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칭화대를 졸업한 리핑은 은행원으로 취직해 대출을 끼고 베이징 시 차오양구에 주택을 구매했다. 그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맡은 사람은 이 사실을 온 동네 주민 앞에서 한껏 자랑했다. 자식의 성공이 가족의 성공으로 완벽하게 등치 되는 순간이었다. 베이징 호구를 받은 리핑은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온 가족의 헌신을 모를 리 없는 리핑은 보답을 확실히 했다. 몇 년 후 양양은 리핑의 인맥으로 베이징의 부동산 회사에 취직했고, 리핑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가 베이징 외곽에 마련한 아파트에 살게 되었으며, 미국 여행도 다녀왔다. '3대가 노력해야 입성할 수 있다'는 베이징에 정착한 리핑 가족은 해피 엔딩을 맞았다. 


<민간중국> 4장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급격한 시장논리 도입으로 한때 소련의 기술과 풍부한 자원을 보유한 ‘동북 3성’ 지역이 어떻게 몰락했는지를 설명한다. 동북 지역은 남쪽의 연해지역과 함께 중국의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 옛날의 계획경제를 표방했던 동북 지역과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연해지역은 공산당의 경제 정책 변화로 희비가 엇갈렸다. 연해지역은 화교 자본의 유입으로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뤘는데 반해 동북지역은 자원의 고갈과 그에 따른 공산당의 관리 포기, 잇따른 무급휴직이라는 이름의 노동자 대량 해고로 ‘지나간 역사’쯤으로 기억되었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시아깡은 그렇게 생겨났다. ‘동북인은 게으르다, 국가에 의존만 한다, 평생 공장에서만 일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 등의 비난 속에 푸순의 실업자 양성 문제에 대한 비판은 없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Bullshit Job>에서 사회는 원망의 균형으로 흘러간다고 주장했다. 그가 책에서 든 사례는 다분히 미국적이지만 노동자 계급이 엘리트를 원망하고, 노동자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노동자를 원망하는 것은 미국과 다르면서도 닮았다. 미국 백인 노동 계급이 진보 엘리트(할리우드 배우, 언론인, 지식인)를 원망한다면 중국의 노동계급은 엘리트 간부를 원망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는 모두 그들보다 형편이 좀 더 나은 대중으로부터 원망을 받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이 사회지도층을 원망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더 이상 사회에 어떤 좋은 기여도 하지 못한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동북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자’라는 타이틀은 단순히 직업이 아니라 가족과 국가가 단위로 묶여 운명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노동자를 경제 발전의 중심으로 끌어오고 그들에게 사회에 기여하라는 의무를 지운 것은 공산당인 것이다. 그래서 동북 노동자들이 간부들의 부패와 거짓 보고를 비판하는 것에는 운명 공동체의 해체와 동시에 자신의 삶이 파괴된 것에 대한 울분이 깔려있다고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시아깡이 된 리핑의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세상에 대해 한탄하며 홍위병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가 주인공이었던 시대는 저물었고, 이제 그의 아들 리핑이 나서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차례가 되었다. 칭화대에 다니는 리핑의 어깨에는 결혼, 가족 부양, 양양의 미래, 베이징에서 살아남기 등 많은 미션이 걸려있었다. 더 이상 국가를 믿을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동북 노동자 가족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리핑은 자신의 의무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지만 솔직히 그의 처지가 조금은 안타까워 보였다. 결혼해서 자신의 가정을 돌보며 부모와 조부모까지 돌보는 것은 한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가혹해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옛날 단위 체제에 의존했듯이 이젠 특정 가족 구성원에게 모두가 의존하는 모습을 목격하니 70, 80년대 한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4년 전 도쿄를 여행할 당시 있었던 일이다. 한국인 관광객 사이에서 쇼핑 성지라고 불리는 돈키호테에서 귀국 전 마지막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계산을 하러 줄을 섰는데 내 앞에서 어떤 중국인 여성이 한참을 계산하는 것이었다. 궁금해서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고 계산대를 훔쳐봤는데 같은 화장품을 무려 30개를 넘게 구매하는 것을 보고 중국 부자 특유의 플렉스(flex)를 시전하나 보다 싶었다. 평소 중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중국에 학과 차원에서 연수도 갔다 온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거 다 자기 가족이랑 이웃들 나눠주려고 사는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이 흘러 경제적 여유가 생긴 중국인에게 여행은 아직도 큰맘 먹고 가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단 한번 여행을 가게 되면 동네 이웃과 친척, 그리고 지인에게 줄 선물을 잔뜩 산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중국 여성도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리핑과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어깨에는 어떤 미션이 걸려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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