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Butterfly> 리뷰
한때 인스타에서 돌아다니던 밈이 하나 있었는데요. 커플 사이에 "만약 내가 어느날 갑자기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거야?" 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테스트였죠. 오늘은 가장 내밀한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이 '만약에'로 시작된 사건을 조명한 영화를 리뷰해보겠습니다.
<M. Butterfly>는 1993년작 영화입니다. 감독이 그 유명한 '롤리타', '데미지'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이고, 제레미 아이언스옹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앞의 두 영화와 합해져 이 배우의 '잘못된 사랑' 3부작 중 하나로 불리고 있더라고요. 도대체 얼마나 잘못되었길래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싶었지만 포스터 분위기로만 봐서는 기껏해야 유부남이 바람피는 이야기 정도(?)겠거니 했습니다.
영화의 원작이 연극이라 연극처럼 막을 나누자면 3막 정도의 러닝타임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1964년,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회계사 르네 갈리마드는 직장에서 다른 팀 직원들의 눈총을 받고 업무적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자존감이 떨어졌을 무렵 우연히 베이징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연기하는 송 릴링에게 시선을 빼앗깁니다.
공연이 끝나고 그녀에게 다가가 대화를 시도하지만 제국주의자, 멍청한 서양인 취급만 받은 르네는 서양 여자와는 다른 그녀의 매력에 빠져 몇 번의 만남을 가집니다. 이후 송 릴링도 마음을 열어 둘은 연인 관계가 되죠.
그런데 이 여자, 너무나도 수상합니다. 성관계를 거부하고 옷을 벗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송 릴링의 행동이 의심스럽지만 동양인 특유의 수줍음 탓이라고 생각한 르네는 그냥 믿기로 합니다. 관계가 전혀 없었는데 송은 임신을 하고(?) 중국에서는 아이를 생후 3개월 전까지 여자의 친정에서 기르는 것이 관습이라며 그녀는 본가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실 송 릴링은 공산당의 스파이였고 심지어 남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르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죠. 송은 어떻게든 혼혈 아이를 구해 르네에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경극 배우였던 송은 홍위병의 감시 대상이 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되고 르네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떠나보냅니다. 극 중에 관객은 이미 송이 남자라는 것을 눈치채지만 르네는 그러지 못합니다.
한편 베트남전에 대한 오판으로 해고되어 프랑스로 돌아오고 아내와 이혼한 르네는 집을 중국식으로 꾸미는 등 송 릴링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기적과 같이 프랑스로 온 송과 재회하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얼마 뒤 르네와 송 릴링은 국가기밀 유포죄로 체포되어 법정에 섭니다. 법정에 나온 송은 남자였고, 자신의 죄를 모두 인정하는 모습에 르네는 충격을 받았죠. 교도소로 가는 호송차 안에서 ‘당신이 사랑한 건 남자’라는 송의 팩폭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그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못했고,그 후 교도소에 수감된 르네는 여장을 한 채 송이 연기하듯이 푸치니의 나비부인 비스무리한 연극을 끝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영화는 흥미로운 점이 굉장히 많아요.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을 계속 던져주는 건 90년대 영화들의 특징인가 봅니다. 느낌상 영화의 플롯이 반전도 있고 스파이,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 그리고 제국주의라는 소재때문에 충분히 스릴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성향이 성향인지라 이 엄청난 사건을 비틀린 로맨스, 내지는 유사 로맨스로 풀어낸 것 같아요.
르네는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해 결핍된 인정 욕구를 송 릴링에게서 얻고 싶어합니다. 송 릴링은 서양 백인 남성이 숨긴 열등감을 채워주는 존재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고요. 그래서 르네의 ‘나의 나비가 맞냐?’라는 질문(나비 부인처럼 무조건적이고 순종적으로 나를 지지해줘)에 ‘맞다’고 대답했습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들만의 love language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번 보고 나니 일방적으로 믿는 관계를 선망하는 르네를 포섭하기 위한 송 릴링의 계획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을 둘러싼 그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주도할 수 없는 현실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의 노예에요'를 읊는 송 릴링의 존재 앞에서 르네가 흔들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지 않았을까요?
작중 배경이 1964년 중국 베이징이고 '중국은 과거를 산다'는 송 릴링의 대사와 르네라는 백인 남성이 상징하는 바를 생각하면 이 공식은 딱 동양과 서양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통 사랑을 하면 상대에게 맞추느라 성격이나 가치관 등이 바뀌기 마련인데, 르네는 송을 만나기 전과 후의 가치관이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송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주인 행세를 하려는 모습을 보이죠.
중국과 이웃 나라의 국제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르네는 중국에서 정치적 변동은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희대의 오판을 합니다. 실제로 이 시기는 대대적인 문화혁명이 일어난 시기죠.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아마도 르네로 대변되는 서양이 자만과 게으름으로 동양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반대로 송 릴링은 서양이 오랫동안 거부해오고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똑똑한 동양인 여성’을 표현합니다. 굉장히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르네에게 접근하는 모습들이 그렇죠.
르네는 국가기밀 유포죄로 체포된 뒤에도 송 릴링이 여장 남자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면 내 안의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럼 자신이 사회로부터 학습받은 남성성이 무너지고 당시의 성소수자를 사회가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하면 거부하는 것이 당연했죠.
그렇다면 송 릴링은 어떨까요? 그는 경극배우고 얼마든지 경극에서 여자 역할을 맡아온 경험으로 확고한 자신의 남성성을 지켰을 것 같지만, 작중에서 집에 혼자 있을 때마저 여장을 한 모습에서 저는 그 역시 르네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혼자 있는데 여장을 하고 있나?” “공화국을 위해서요” 라고 대답은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건 핑계라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이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던 1980년대 중국 스파이 스페이푸는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도 자신이 여성이라고 수차례 진술한 것으로 보아 스스로를 트랜스여성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이상할 정도로 르네가 불쌍하지 않더라고요. 분명히 피해자인데 말이죠.
르네가 당하는 게 통쾌하다 느껴지면 그건 제가 아마도 동양인이어서, 제국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은 나라에서 살고 있어서겠죠. 영화의 원작이 연극이라고 들었는데, 원작자가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보고 왜곡된 동양의 이미지(결말에서 나비 부인은 자신이 사랑한 백인 남자를 그리워하며 자살합니다)에 화가 나서 비틀어 쓴 것이 이거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런 의미라면 작가의 목적은 꽤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영화를 몇 번이나 봐도 송 릴링의 의중은 전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는 처음부터 르네를 공작의 대상이라고 보고 접근한걸까요? 아니면 정말로 사랑했을까요?
감독은 실제 사건을 따라서 후자로 해석한 듯합니다. 저도 실제 사건을 찾아보고 후자로 생각이 기우는데, 오히려 송 릴링의 의도를 끝까지 모호하게 처리했으면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더 안겨줘 영화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개인적으로 좀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호한 영화는 계속 찾아보게 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꾸준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 <M. Butterfly> 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