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Nov 17. 2024

낱낱의


#1

세탁기의 위쪽 부분에 손을 넣자 물컹한 것이 만져진다 집요하게 긁어내자, 꽃게의 등딱지에서 미처 긁어내지 못한 내장 같은 것이 딸려 나왔다 통돌이 세탁기가 몇 년 동안 품고 있던 내장이었다 내장을 빼앗긴 세탁기는 홀가분해 보였다 진하고 비릿 맛의 내장은 한 소쿠리나 되었다 낱낱이 품고 있던 사랑의 잔해였다 그것들이 모여 얽히고설킨 것이 한 소쿠리다


#2

통돌이 세탁기는 과탄산나트륨이 담긴 물을 가득 마셨다 흩어졌던 모든 것들이 명료해졌다 겨울철 성에가 낀 자동차의 유리창을 긁어낸 듯 시야가 선명해졌다 탈수기의 작은 구멍들이 하얗게 변했다 하얀 과탄산나트륨은 세탁기를 하얗게 만들었고 통돌이는 모두 그것을 게워낸 다음 다시 마시고 게워내고 다시마셨다 세탁기의 마음이 차가워지자 곧 세탁기의 손 발 또한 차가워졌다


#3

통돌이의 심장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남김없이 헹궈진 물의 흔적이,  흩어진 내장의 잔해가, 마지막 한 방울의 눈물이 되어 왈칵 쏟아졌다 몸속에 새겨진 하얀 구멍들을 바라보고 나서야 통돌이는 잠시 멈춰 서는 법을 배웠다 멈춰 선 통돌이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잊은 것은 없냐고


#4

한소쿠리의 내장을 들고 나는 달린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토닥토닥 그것을 파묻는다 에어팟을 끼고 태연히 돌아온다 잔망스럽게 내 왼쪽발은 박자까지 맞추며 춤을 추고 있다 세탁기가 날 보며 말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거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들숨의 습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