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했던 천조국! Free Country!! -
이전 이야기 요약
1. 한국을 떠나 미국에 잘 도착했다.
2. 음식의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3. 우려했던 것보다는 영어가 잘 통했다.
3편 시작
설렘과 기대로 마무리를 지었던 미국에서의 첫날이 지나고 다음 날.
미국에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낯선 땅에서의 첫 출근길이 무섭지는 않았다.
직장의 위치와 그곳으로 가는 길을 미리 구글 스트리트뷰로 수 차례 반복해서 가봤으니 말이다.
원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출근길에 나섰다.
아침 11시가 가게 오픈 시간이니 10시까지 출근하면 된다고 미리 안내를 받았었다.
근면하고 성실한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던 나였기에 10분 전인 9시 50분에 도착을 했으나 가게는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역시 미국 놈들은 약속 시간을 잘 안 지킨다더니...'
'역시 미국 놈들은 성실하지 못하다더니...'
'역시 미국 놈들은...'
혼자 구시렁구시렁 꼰대스러운 불평을 하면서 가게 앞에 앉아 폰으로 그 당시 제일 많이 들었던 노래인
2Pac의 California Love를 틀어놓고 흥얼거리고 있었다.
노래 가사 중
Now let me welcome everybody to the Wild Wild West
라는 대목이 왠지 나에게 하는 말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게 앞 골목길 끝에서 커다란 농구 유니폼을 입은 힙합스러운 인물이 등장했다.
내가 틀어놓은 노래에 리듬을 맞추며 몸을 흔들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등장하는 그 모습에 약간 어이가 없으면서도 재미있어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다가오며 대뜸 주먹 인사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Yo"
'뭐지 이놈은..'
그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 요리사인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이미 내가 첫 출근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세심하게도 나의 이름도 외우고 있었다.
"Hi my new friend Jason. Jason right?"
"Hi. Kyle.. actually"
'미국 놈들이란..'
그는 가게 문을 열지도 않고 나와 함께 길바닥에 앉아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2Pac의 California Love를 계속 들으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노래를 들으며 서로에 대한 소개를 주고받은 후 그는 가게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는 뒷 주방(밥, 튀김, 국을 만드는 주방)이고
여기는 앞 주방(초밥이나 롤을 만드는 주방)이고
이건 회전초밥 레일이고 여기는 창고 어쩌고..
설명 없이도 한눈에 가게가 다 파악될 정도로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은 매장이었지만 재잘재잘 떠들면서 친절하게 가게를 소개해주는 그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열심히 리액션을 해주면서 들었다.
오늘은 보스가 출근을 안 하는 날이라면서 나보고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하길래 레시피 매뉴얼만 알면 가게 메뉴는 다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미 인터넷으로 가게 메뉴를 다 봤었고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메뉴가 더 단순하고 쉬웠기에 그렇게 말을 했더니 크리스는 화색을 띠며 그럼 오늘은 보스 자리에서 초밥 위주로만 만들어 달라고 했다.
앞 주방 자리가 총 4군데가 있었는데 가게 입구와 가장 가까운 자리이자 가게의 얼굴과도 같은 메인 자리인 보스 자리에서 나보고 첫날부터 근무를 하라니..
보스 자리에 가보니 초밥을 만들기 위한 재료 손질은 전날 다 마쳤는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생선 초밥 메뉴가 참치, 연어 그리고 방어뿐이라서 메뉴 이름을 암기하기도 편했다.
내가 이것저것 점검을 하는 사이 크리스는 밥을 짓겠다며 뒷 주방으로 사라졌고 얼마 안 가서 다른 직원들도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했다.
다들 밝고 쾌활하게 나를 뉴 가이라며 인사를 건네며 반가워해주었다.
'분위기 나쁘지 않은걸?'
영업 시작 30분 전이 되어서야 전원 출근 완료라는 한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광경이 참 마음에 들었다.
원래 이렇게 다들 지각하는 건지, 보스가 오늘 안 와서 이러는 건지 크리스에게 물었는데
어깨를 으쓱하며 원래 이 정도에 다들 온다는 말에
‘꽤나 멋진 곳에 왔는걸 ‘
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것이 천조국! 자유국가구나! Free Country!'
며칠 안 가 출근 문화가 원래 이렇다는 말망언은 크리스의 허세였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보스가 출근하는 날도 10시 10분 이전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보스마 저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으니 한국의 주방에서만 일해봤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신선한 근무 환경이었다.
일식 가게는 보통 점심 전에 출근해서 재료 준비를 하고 점심 장사를 하며 재료를 대부분 소진시킨다.
그리고 저녁 장사 전까지 잠시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고 휴식을 취한 후 저녁 장사 재료를 준비한다.
저녁 장사를 마쳐갈 무렵에는 가게 상황을 살피며 다음날 쓸 재료를 일부 준비하고 장사가 끝난 후에는 1시간 내로 가게 청소 및 정산을 끝낸 후 퇴근을 하는 루틴을 가진다.
내가 한국에서 일할 때와 이 가게가 달랐던 점은 브레이크 타임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였다.
대신 근무 중에 정말 바쁜 때만 아니면 누구나 언제든지 잠시 가게 밖으로 나가서 나무 그늘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폰 게임을 하거나 멍하니 쉬기도 했다.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은 가게 안에 다시 들어와서는 손을 꼼꼼하게 잘 씻는 청결함은 다행히 가지고 있었다)
세심한 크리스를 제외한 모두가 나를 Jason이 아닌 Kyle(카일)이라고 헷갈리지 않고 불러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가 무난하게 잘 흘러갔다.
처음에는 앞 주방에서 같이 일을 하는 요리사 친구들이 무표정하게 나의 칼질과 나의 초밥 쥐는 모습을 시종일관 계속 지켜보고 있어서 나를 새로 온 경쟁자로 생각하나 싶은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경계를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점심 장사가 끝난 후에 다가와서 하는 말이 아시아 요리사들이 손재주가 좋다면서 아까 했던 초밥 쥐는 스킬 다시 천천히 보여주면 안 되냐며 맥주 한 병을 나에게 건네며 바보같이 활짝 웃는 모습에 나의 경계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다 잠시 혼자 가게 밖으로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았다.
참 바보 같았다.
사람에 대해 마음을 열고 살아도 되는데...
도피자를 자처했던 나는 혼자 쓸데없이 세상에 대해 문을 닫고 경계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싸움을 하며...
먼길 떠나와서 새삼 그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남은 맥주를 마시고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고 그렇게 미국에서의 또 하루가 끝이 났다.
첫날의 근무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로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 중 하나이다.
그리 바쁜 날도 아니었고 업무 자체만 보면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더 간단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훗날 나의 절친한 친구가 된 크리스를 처음 만났던 날이었고
일을 할 때 신나고 즐겁게 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알게 된 날이었으며
무엇보다 도피자를 자처했던 우울함과 사람에 대한 경계만이 가득했던 내가 모처럼 오랜만에 활짝 웃으면서 마음 편하게 하루를 보냈던 날이기에 그날은 참 특별한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세심한 남자 크리스와 함께였다.
그날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크리스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처럼 나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는 내일은 쉬는 날이니 집으로 가지 말고 자기 집으로 함께 가서 맥주 한잔 하자고 권했다.
자기 아내와 아이도 소개해주겠다며...
"What? wife? baby?"
나보다 3살 어린 당시 갓 20살 넘긴 녀석이 아내와 아이를 소개해준다고 한다.
'Hmm.. interesting..'
재미있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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