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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재 Oct 13. 2022

시각장애인이 시각디자인을 하는 방법

가능에 가까운 삶을 살자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 보면 시각적인 디자인을 할 일이 생각보다 많이 생긴다. 홍보문, 포스터 제작부터 배너, 판촉물 제작, 자료실 내 사인물 및 전시 코너 등등. 다양한 목적에 알맞은 디자인을 해야 하지만 전공인 문헌정보학과에서는 관련된 수업이 하나도 없다. 결국 직접 부딪혀보며 배워야 한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게 된다. 텍스트를 읽는 것과 그림, 사진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텍스트로 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비교적 수월한 반면 이미지를 고장 난 눈에 입력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때로 불가능한) 일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인지, 대체로 텍스트와 이미지를 잘 인식하기 위한 보조 도구들도 텍스트에 좀 더 치중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에는 다른 비장애인 직원들처럼 디자인을 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때 중점을 두는 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생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에너지를 쏟고,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까운 부분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방식이다. 나는 황반변성이라 초점부의 시력이 거의 없고 주변부의 시력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초점부의 시력이 없으면 색깔 구분도 잘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배색을 잘한다든지 색깔 조합을 잘해서 미적으로 아름다운 효과를 내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텍스트와 이미지의 배치, 적절한 탬플릿과 폰트 선택, 가시성 등에 중점을 두고 디자인을 한다.


6년 전,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홍보문 하나 만드는 게 어려웠다. 이건 비단 나의 문제만은 아니었는데, 당시에는 파워포인트로 대부분의 홍보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워포인트로 홍보문을 만들려면 난관이 아주 많은데, 먼저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제일 고역이다. 저작권에 저촉되지 않는 무료 폰트와 무료 이미지를 찾아서 어찌어찌 넣다 보면 원래 의도했던 결과물이 아닌,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게 만든, 공공기관에서 만든 느낌이 확 나는 '후진' 모습의 홍보문과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어찌어찌 파워포인트 템플릿을 몇 개 구하면 그것들 가지고 몇 번이나 우려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망고보드', '미리캔버스'와 같은 디자인 플랫폼은 저작권법에 저촉될 염려 없이 원하는 이미지와 폰트를 맘껏 쓸 수 있으면서 기존에 이미 만들어진 템플릿을 사용할 수 있어 작업 시간도 많이 단축시켜 준다. 또, 탬플릿들을 보다가 응용할 여지도 많아 창의적이고 신선한 결과물이 탄생하기도 한다. 중국집 홍보문을 고쳐 중국 다문화 전시 포스터를 만든다든지, 미술학원 홍보 포스터를 고쳐 웹툰 제작 프로그램 홍보문을 만든다든지 하는 식이다.


예전에는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잘 '검색'하는 것도 중요해진 세상이다. 디자인에서도,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주어진 도구를 잘 활용하고 잘 고르는 '안목'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한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에게 시각디자인은 어렵지만 사실 비장애인에게도 어려운 것이 디자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디자인 실력은 선척적인 능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후천적인 경험도 크게 작용한다. 좋은 디자인, 나쁜 디자인, 멋진 디자인, 구린 디자인, 잘 보이는 디자인과 잘 안 보이는 디자인 등을 꼭 일과 관련된 분야 말고 일상에서 세심하게 관찰한다면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나중에 멋진 디자인을 만드는 데에 일조할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경험치를 쌓아 레벨 업 한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장애인으로서 직장에서 일하면서 즐거운 때 중에 하나는, 비장애인들과 다름 없이, 때론 더 잘 일한다고 인정받을 때이다. 내가 만든 홍보물이 멋지다고, 업체에서 만든 것 아니냐는 과찬을 받을 때면 쑥쓰러우면서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꼭 시각장애인이라고 시각디자인을 못한다는 법은 없다. 그건 가능보다 불가능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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