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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그놀리아 Aug 17. 2022

비상선언 리뷰 : 모든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는 것.

한재림 감독 작품, 별점 4.0/5점

<비상선언>의 오프닝은 상당히 정적이다. 비상선언의 정의와 차지하는 위치를 작은 글자로 설명한 후, 인천공항에 주차된 여러 비행기들을 아무런 대사 없이 차례대로 보여주며 이상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영화에서 가장 경악스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테러의 목표가 영화 초반엔 정해지지 않은 채로 시작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한다면 첫 장면의 그 정적인 카메라가 테러할 비행기를 물색하는 류진석(임시완)의 눈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곧, 류진석은 인천공항의 데스크 직원에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는 비행기가 어디예요?"묻고,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직원이 대답하지 않자 류진석은 공격적인 태도로 "그런 식으로 웃지 좀 마세요. 걸레 같은 게..." 라며 쏘아붙이고 그 자리를 떠난다. 화장실에서 겨드랑이의 피부 사이 깊숙이 무언가를 넣다가 자신을 지켜보는 눈길을 발견한 류진석은 급하게 문이 닫힌 칸으로 걸어가고, 딸을 찾아서 남자화장실에 들어온 재혁(이병헌)은 딸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여자화장실에 사람이 많아 남자화장실로 갔던 그의 딸 수민(김보민)은 그제야 문을 열고 나와 아빠 품에 안긴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부녀를 기꺼이 따라온 진석은 재혁이 딸을 챙기는 사이 재혁의 가방에 쓰여 있는 "호놀룰루"를 확인하고, 놀랍게도 그제야 목적지를 정하게 된다. 호놀룰루로.


형사팀장 구인호(송강호)는 바쁜 일 때문에 가족들과 약속한 휴가를 가지 못하게 되고, 아내는 혼자 가겠다며 곰국 15일치를 끓여놓고 간다. 인호는 경찰서에서 앉아 있다가 비행기 테러 신고가 접수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걱정스러웠던 나머지 신고한 아이들에게 물어가면서 테러범의 집에 찾아간다. 그 집은 쓰레기 냄새인지 모를 역한 냄새가 나고, 같이 온 후배 윤철이 들어가기 싫다고 하자 인호 혼자 집 안을 수색한다. 인호는 집 내부를 샅샅이 둘러보던 중 썩어가는 시체를 발견한다. 신고받고 온 국과수는 집 안을 검사하고, 인호는 하와이에 갔다는 아내가 너무 걱정돼서 공항에 방문한다. 직원들과 짧은 대치 끝에 류진석이 탄 비행기의 목적지가 호놀룰루인 것을 확인한 인호는 안심했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호놀룰루... 면 하와이 아니에요?"

그리고 뒤져본 탑승객 명단에서 아내의 이름을 확인한 인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사실상 영화는 이 스토리들로 구동하게 된다. 충실히 짜여진 이러한 시놉시스 안에서 배우들은 열연을 펼치고, 배우들의 열연에도 남은 약간의 구멍은 한재림 감독이 채워 나간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첫 감염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사실상 아무런 일이 없는데, 이병헌 배우와 임시완 배우가 주고받는 스릴 넘치는 눈빛과 무게감 있는 연출은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한다. 영화의 메인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류진석 캐릭터는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퇴장하는데, 퇴장하고 나서도 그의 영향은 하늘을 찌를 듯하기도 하고 사실 영화의 메인 빌런은 그 암담한 환경 그 자체로 느껴졌다는 점에서 류진석의 퇴장에서 오는 빈자리는 그리 크지 않다. 또한 이 영화에는 유난히 주인공들의 모습이 아닌 허공을 비추는 카메라를 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굉장히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바이러스 감염 영화에서는 그 무엇보다 공기가 가장 중요한데, 공기에 바이러스가 있다는 것을 굳이 부각하지 않음에도 관객들은 느끼게 된다. 관객들은 코로나의 한복판을 겪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된 마스크 생활은 이 영화를 더욱 잘 느끼게 해 준다. <비상선언> KI501편의 탑승객들은 류진석이 아무리 바이러스를 묻히고 치료 기기로 바이러스를 뿌리고 다녀도 몇몇 조심성 있는 탑승객들을 제외하고는 마스크를 끼지 않는데, 그 장면을 볼 때도 마스크를 쓰고 보는 관객들은 본질적인 공포와 긴장감을 경험한다. 영화의 개봉을 계속해서 미룬 건 물론 흥행 압박 때문이었겠지만, 지금 시기에 개봉한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이미 검증된 배우들이 태반이니까. 하지만 너무 탁월했기 때문에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는 단연 임시완 배우이다. 난 이 영화에서의 임시완 배우의 연기가 그의 최고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걸출한 작품에서 보여준 광기 어린 "윤종우" 캐릭터를 표현한 연기가 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비상선언에서도 아주 탁월했다고 본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어딘가 굉장히 섬뜩한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고, 비행기에 타고나서는 본색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인데 임시완 배우에게 최적의 캐릭터였다는 생각이 든다. 강렬하게 등장해서 짧은 시간 관객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다음 퇴장하는데, 그 30분 남짓의 장면은 임시완 배우의 힘이 매우 컸다고 생각된다.

송강호 배우는 역시나 안정적이다. 그의 안정된 연기는 영화 자체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구인호 캐릭터는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비행기 테러 말고도 육지에서 벌어지는 서스펜스를 도맡는 역할이다. 초반 류진석의 집에서도 그렇고, 중반 교통사고와 후반부의 희생까지. 이는 송강호 배우의 애처로운 표정 연기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송강호라는 배우의 굉장히 진중하지만 어딘가 코믹한 그 이미지는 영화의 바퀴에 기름칠을 해준다. 구인호는 시종일관 정색하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웃는다. 희망이 느껴진 건지도.

이병헌 배우는 초반부에서는 굉장히 약하고, 어딘가 모르게 비어있는 인물이었다. 이는 "재혁"이라는 인물의 표정에서도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오랜만에 비행기를 조종하는 순간 그의 눈빛은 완전히 달라진다. 너무나도 자신감에 찬,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재혁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희망을 준다. 젊은 시절 비행기를 몰던 재혁이 그런 표정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면 슬쩍 처연해지기도 한다. "현수"역의 김남길 배우와 연기 시너지가 좋았는데, 멀어진 두 인물이 대화를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그 장면들이 굉장히 좋았다.

이 밖에 김소진 배우, 전도연 배우, 박해준 배우 등 연기력이 정평이 난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지만, 캐릭터는 많이 아쉬웠다. 김소진 배우가 맡은 사무장 캐릭터는 제외하고 전도연 배우가 맡은 김숙희 장관, 박해준 배우가 맡은 박태수 실장의 캐릭터는 너무나도 기능적으로 이용된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인지 캐릭터에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영화이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음악이다. 이병우 음악감독은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음악감독 중 하나이며,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악감독이다. 같은 한재림 감독의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신을 많은 이들이 기억할 것이다. 그 장면은 이정재 배우의 카리스마, 송강호 배우의 표정연기도 대단하지만 진짜 히로인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불길하고 또 불길한 음악, 가슴을 쿵쿵 치는 북소리, 웅장하게 울리는 관악까지. 이병우 감독은 그 장면을 이정재 배우의 인생 장면으로 만들었고, 한재림 감독 필모에서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병우 감독의 음악은 영화의 클래스 자체를 올리기도 하는데, 김지운 감독의 <장화홍련>은 영화 자체가 워낙 수작이지만 엔딩에서 흐르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은 영화가 주는 느낌을 한층 업그레이드시킨다. 임수정의 그 걸음이 주는 처연함을 훨씬 부각시킨다. 또한 이병우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 두 번이나 작업했는데, <괴물>과 <마더>인데, 두 작품의 음악은 지금도 회자되는 수준. <괴물>의 사운드트랙 중 <한강 찬가>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함축시켜놓은 듯한 음악이다. 코믹하면서도 굉장히 비극적인 음악이다. 개인적으로 <마더>의 사운드트랙 중 오프닝과 엔딩에 흐르는 음악인 <춤>을 굉장히 좋아한다. 장면 자체를 너무 좋아하지만 음악이 들으면 장면이 떠오른다는 건 그만큼 음악이 주는 울림이 크다는 것일지도.


대한민국은 그동안 여러 참사들을 겪어 왔다. 그중 <비상선언>처럼 완벽하게 해피엔딩인 사례는 없다. 이 영화는 결국 판타지이고, 현실은 대부분 새드 엔딩이다. 2014년 발생한 세월호 사건도 그렇다. 우리 국민들은 뜨겁게 울어주고 뜨겁게 응원했지만 결국은 300명 언저리의 사람들이 사망하고, 아직도 몇 명은 못 나왔다. 오히려 영화보다 조금 더 좋은 환경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사건이었지만. 300명이나 못 나왔다.

한재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세월호를 떠올리고 있다. 후반부에서 나오는, 하지 못한 말들을 쏟아내는 소위 "신파" 장면은 세월호 사건 당시 가족들에게 희생자가 보낸 문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전도연 배우는 마지막 장면에서 항구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는데, 이 장면은 마치 팽목항에서 울던 사람들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사실 이러한 장면들은 다른 참사들에도 있어왔던 장면들이다. 삼풍 때도 그랬을 것이고, 성수대교 붕괴 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와는 다르게 안전하게 착륙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이 재난에서 육지의 사람들은 각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최대한의 국익을 위해 생존자들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처절한 희생에 눈물을 짓고 생존자들의 희망을 느끼며 미소를 짓는 장관도 있었다. 비행기의 부기장과 승무원들은 모든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중간에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슬픈 결심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은 최선을 다했다. 한재림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 모든 참사들의 과오를 탓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참사들이 해피엔딩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 때는 지켜지지 못했지만, 그 방법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거면 되지 않은가. 

이 영화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더욱 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지만, 그럼에도 장점이 단점보다 배로 많았고, 사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는 좋은 작품이다. 너무나도 저평가된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한재림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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