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수우미양가의 시절은 지났으니까
“난 현모양처가 꿈이야.”
솔직히, 나는 그게 쉬운 줄 알았다. 대학 졸업을 앞둔 또래 친구들이 디자이너나 선생님을 꿈꿀 때 난 으레 그렇게 내뱉곤 했다.
그 기저엔 생업에 메이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깔려있었고, 거기엔 학비가 만만찮은 미대에서 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둘 정도로 넉넉했던 가정 형편을 믿는 구석도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비혼주의나 딩크족이라는 단어가 아직 사전 속에 잠들어 있었고, 결혼하고 아일 낳는 게 쉽게 만만한 허들처럼 느껴질 때였다.
그것이 아주 높은 장벽이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먼저 우리 집 가세가 기울었다. 가족은 흩어졌고, 나는 이자율 7%가 넘는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여러 고시원을 전전해야만 했다.
간신히 자릴 잡고 정신을 차려보니 난 미술관에서 먼지떨이를 쥔 채 관람객을 기다리는 자가 되어있었다. 도슨트. 사람들은 내 직업을 그렇게 불렀다. 전시대 위 먼지를 털어내고 미술관 문을 열면 밤새 촉촉해진 공기가 가장 먼저 발을 들였다. 그게 내 첫 손님이었다.
근근한 월급으로 어찌어찌 학자금을 갚고, 결혼도 하고, 교수가 되겠다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날아왔다. 마침내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던 내 오랜 꿈을 펼칠 시간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엄마는커녕, 좋은 아내가 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반세기 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누군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끼익-끼익 거실 바닥까지 울려 우리의 가난을 청각화시켰고, 도통 늘지 않는 영어 실력과 학교에서 10시간 넘게 논문과 씨름하고 오는 남편 때문에 고립감과 울화만이 켜켜이 쌓아갔다.
내가 네 도시락이나 싸려고 여기까지 왔냐며 남편과 한바탕 싸운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 정확히 말해 현모양처가 될 수 있을 만큼의 열정과 여유를 누리는 건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걸.
결혼한 지 10년 만에 비로소 나는 엄마가 되었다. 배고프다고 왱왱 우는 아이에게 허겁지겁 가슴을 내어주고 한숨 돌리다 보면 문득 전시대 안 고요히 잠들어있던 미술관 작품들이 떠오른다.
먼지떨이 하나로 모든 티끌을 훌훌 털어내던 시절은 마치 아득한 전생 같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기에게 불평하고, 손이 굼뜬 남편에게 툭하면 화를 내는 내가 어질고 현명한 엄마이자 아내가 되는 건 티끌로 산을 쌓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현모양처의 ‘양’이랑 수우미양가의 ‘양’이랑 같은 한자일걸?”
딸의 신생아 정기검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대를 잡은 채 내 자책 섞인 푸념을 듣던 남편이 말한다. 좋은 엄마이자 아내가 되는 데 아주 ‘우수’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는 말을 덧붙이면서. 그게 위로인지, 고도화던 놀림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현모양처의 ‘양’과 수우미양가의 두 번째 꼴찌인 ‘양’과 같은 뜻이라니 부담은 좀 더는 느낌이다.
그렇담 양껏 해보자고.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되뇐다. 우리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게 최우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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