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는 커리어의 방향을 설정하는 제도가 있다. 내가 리더로 성장할 것인지, 아니면 전문가로 성장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난 당연히 회사에 있으면서 팀장이나 더 나아가 임원과 같은 리더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리더로 성장하는 방향을 설정했었다. 물론 전문가로의 직급체계가 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자릿수도 적고 뭔가 하나의 연구에만 몰두해야 하는 것이 내겐 별로 탐탁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간 나의 커리어 방향은 리더 트랙으로 맞춰져 있었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커리어 방향을 점검하고 재설정해야 했다. 이 작업이 끝나면, 모든 팀원들은 팀장과 면담을 하게 된다. 팀 구성원들이 앞으로 회사 다니면서 어떠한 비전을 갖고 갈 것인지,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 성장하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개인 별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 또한 면담에 들어갔다. 내 커리어 계획은 작년과 동일하고 큰 변동이 없어서 면담이 일찍 끝났는데, 팀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팀원들 중에 유일하게 자네만 리더 트랙을 선택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전문가 트랙으로 바꿨고... 왜 그런 것 같아?"
나도 이 얘기를 듣고선 살짝 놀라긴 했지만, 다른 팀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대강 알 것도 같았다.
"우리가 하는 업무 자체가 저희 팀에서만 하는 좁은 영역의 업무라서 그러지 않을까요? 팀 규모도 작으니까 어차피 팀장도 한 자리고 전문가도 한 자리면, 책임의 범위가 작은 전문가를 선택할 것 같기도 하네요..."
"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전문가 트랙으로 올라가면 결국 팀장은 팀원을 잃게 되는 꼴이거든. 인사권이 내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지."
이제야 팀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왜 다수가 선택하는 전문가 트랙으로 변경하지 않고, 계속 리더 트랙을 고수했을까. 나는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는가. 다시금 내가 선택한 성장 방향을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면담이 끝나고, 동료들을 만나며 팀장과의 면담 내용들을 서로 공유했다. 그러면서 팀원들이 왜 전문가 트랙을 선택하였는지 궁금해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나 빼고 다 전문가 트랙으로 설정했다던데?"
"당연한 거 아냐?"
한 동료의 되물음에 이게 정말 당연한 건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전문가 트랙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자기가 지금까지 해온 업무 영역에서 연구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할 수 있다는 것, 팀장과 동일한 수당을 받는 직급체계가 있고 고과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라는 것, 임원과 같은 전문위원으로도 승진할 수 있고, 본인 영역의 전문가 그룹을 꾸릴 수 있다는 것 등이 있다. 그렇다면 단점은 무엇이 있을까. 아직 전문가 제도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점, 회사 전반에서 팀장 자리보다는 전문가 자리가 적다는 점, 팀장에서 밀린 사람이 전문가 자리를 차지하는 점, 회사의 경영 운영 측면에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는 점 등이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장점과 단점을 나누어서 생각해 보니 개인의 기질과 역량에 따라서 충분히 전문가 트랙을 선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 빼고 모든 팀원이 전문가 트랙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이건 분명 상대적으로 리더 트랙의 매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팀 후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내가 후배에게 물었다.
"김대리는 왜 전문가 트랙으로 선택했어?"
"저희 팀장님만 봐도 알잖아요. 맨날 임원들한테 혼나지, 밑에 팀원들은 대들고 말도 안 듣지... 중간에 끼어서 스트레스만 만땅 받고 있는데... 딱 봐도 힘들어 보이는걸요. 반면 옆 팀 전문 위원님은 혼자서 연구만 하고, 팀 운영 업무는 거의 하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팀장보다 더 나은 고과와 수당을 받으니까..."
역시나 팀원들은 모든 걸 보고 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상황 파악이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뭔가 팀장과 같이 한 조직의 리더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것이 더 멋져 보였는데... 그건 그저 나만의 생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후배가 이어서 말했다.
"게다가... 팀장은 책임이 너무 많아요. 그에 비해 회사에서 대우받지도 못하는 것 같고요... 우리 팀장님 보고 있으면 혼자서 애쓰고 있는 게 정말 불쌍할 정도예요. 그리고 진짜 외로워 보여요... 전 팀장 시켜도 안 하고 싶어요 사실. 다른 동료들도 다 저랑 비슷한 생각일걸요?"
십 년 전, 내가 신입일 때만 하더라도 팀장의 권한은 막강했으며, 모두가 우러러보았고, 팀장이 시키는 일이라면 군말 없이 해내야만 했다. 고과권을 쥐고 있는 팀장에게 잘 보이려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아 재롱을 피웠고, 출장을 갈 때면 운전기사를 자처했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유연한 회사 문화와는 거리가 있어 어느 정도 개선이 되어야 하는 게 맞지만, 과거엔 그만큼 팀장의 존재감이 엄청난 것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변화하여 부드럽고 포용력 있는, 희생정신이 가득한 리더가 사랑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이끌어가는 강인한 카리스마 같은 덕목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꼭 강하게 억지로 끌고 가야만 구성원들이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조직 운영 측면에서 무언가를 결정할 때 팀원들의 모든 의견을 다 반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신속하면서도 강력한 리더의 결단력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의 팀장은 너무나 나약해져 있다. 임원들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어서 팀장의 권한이 약해져서 일수도 있고, 팀원들의 개인주의 문화로 인해 각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 팀장을 힘들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팀장이 되고 싶지 않은 팀장포비아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