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야만 했다. 당일치기로 전라도 광주에 출장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창문 밖을 쳐다보니 전날 밤 10시쯤부터 거세게 몰아치던 비는 잠잠해진 모양이었다. 잠이 들기 전 오늘 아침 출근길을 걱정했지만, 다행히 비는 소강상태였던 것이다. 이불속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뒤 창문 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가느다란 빗방울이 이따금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만약 화단에 피어있는 잡초라면, 지금처럼 아프지 않고 천천히 부어주는 비 맛이 가장 꿀 맛이었을 것이다.
미리 예매해 둔 고속철도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몸을 일으켜 출장에 맞는 상태로 '변신'했다. 그렇다. 지금 몰골에선 변신이란 표현이 가장 적합한 표현일 것이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며 부어있는 얼굴을 진정시키고 이곳저곳 뻗어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후줄근한 잠옷을 내팽개치고, 남색 슬랙스에 하늘색 셔츠를 넣어 입었다. 거울을 보니 누가 봐도 회사원이었다. 이 정도면 됐다. 비가 언제 또 갑자기 쏟아질 수 있으니, 방수 기능이 있는 로퍼를 신기로 했다. 그리고는 회사 노트북 가방에 전날 아내가 사준 도넛 한 개과 찐 계란 두 개를 욱여넣었다. 역에서 마실 걸 사고 고속철도에 타서 아침으로 맛있게 먹을 요량이었다. 이때쯤에도 여전히 비는 끈질기게 떨어지고 있었다.
고속철도역을 가기 위한 버스 시간을 핸드폰으로 확인했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는 생각을 할 때쯤 버스가 거의 내가 타려고 했던 정류장까지 도착해 가고 있었다. 빠르게 짐을 챙기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20층에 살고 있는 나는 엘리베이터 운이 좋아야만 시간에 맞춰 버스 정류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23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었다. 오늘 일어난 후로 가장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버튼을 두, 세 번 연타했다. 눈이 느린 사람이라면 아마도 내 손이 몇 번 움직이는지 세기 어려웠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어느새 내 눈앞에서 당당히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마자 난 마음이 따뜻해졌다. 엘리베이터 구석으로 파란색 줄무늬 플라스틱 통에 우산이 대, 여섯 개 꽂혀있었고, 그 옆에는 큰 쪽지에 글씨가 쓰여있었다. 문구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장마철 필요하신 분 우산 가져가세요
누군가 전날 밤에 다른 사람의 장마철 출근길을 걱정하여 우산을 기증한 것이었다. 담백하게 쓰여있는 문구였지만, 그 안에서 따스한 인류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세상은 이런 분들로 인해 아직도 살만한 것이었다. 비록 우산이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누군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에 거침없이 내밀어줄 수 있는 도움의 손길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느껴져 비 오는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 혼자 따뜻해졌다. 아니, 이 문구와 준비된 우산을 본 모든 사람들은 아침을 아주 풍요롭게 시작했을 테다. 나도 세상을 너무 바쁘게 직선으로만 달려가지만 말고,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줄 수 있는 소소한 손길을 건네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난 집에서 우산을 챙겼기 때문에 기증한 우산을 갖고 가지는 않았다.하지만 그 온기는 내게 충분히 전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우산을 펴고 천천히 여유롭게 걸어갔다. 이번 버스를 놓쳐도 다음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단지 난 조금 더 오래 이 따스함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