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작가 미상)
삶에 호기심은 많았지만 고난은 별로 없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많은 것에 욕심이 있었지만 노력하지 않았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나름 순진한 상태로 사회에 던져졌다. 나의 순진함은 순백은 아니었다. 노란 욕심도 묻어있고 빨간 부끄러움도 있고 파란 잔인함도 묻어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내게 버거웠다. 요란한 내 마음은 금요일엔 철학 모임에 가고 토요일엔 심리학을 기웃거리고 일요일엔 미술 이야기로 이끌었다. 그렇게 여러 이야기들을 들으며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미술과 철학이 만나 전해주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아직은 미술작품을 볼 줄 모른다. 인상파 이후의 미술은 다 비슷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 신표현주의와 개념미술이란 용어도 익숙지 않다. 그래도 꽤 재미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흥미로웠다.
영화는 2차 대전과 그 후 분단된 독일이라는 어두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다. 가스실에서의 학살이나 전쟁에서의 죽음장면들은 비교적 빠르게 지나간다. 물론 내가 영화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한다면 거짓이다. 이해보다는 공감하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한듯하다. 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고 분단된 나라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 그런 내가 당시 독일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를 마음 깊이 느끼며 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 이 작품은 전쟁과 분단이라는 시대상황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을 비추는 영화 같았다. 영화는 주인공 쿠르트라는 인간 자체에 좀 더 집중한다. 그와 대립되는 인물인 ‘장인 칼 시반트’를 통해서도 쿠르트란 인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둘을 스토리를 위한 갈등관계로 보기에는 그 관계가 조금 느슨하다. 스토리만으로 본다면 둘의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도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화 속 장인의 비중이 큰 것은 그를 통해 쿠르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인과 쿠르트는 모두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둘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가졌지만 삶의 태도는 다르다.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쿠르트는 줄곧 진실을 추구하고 시반트는 명예에 집중한다. 쿠르트는 진실을 위해 동독에서의 부와 명예를 버리고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간다. 반면 장인은 교수라는 직함에 연연한다. 진실은 내면에 있고 명예는 밖에 있다. 진실은 내가 정하는 거지만 명예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된다. 대비되는 두 인물을 통해 모호할 수 있는 쿠르트의 가치관을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쿠르트가 추구하는 진실은 삶 자체에 관한 것이고 존재에 대한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의문의 시작은 호기심이었다. 쿠르트는 이모의 가슴을 유심히 보기도 하고 여자의 나체를 자주 그리곤 한다. 성적인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이 근본적 호기심이 삶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예술과 연결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영화 속 불편할 수 있는 잦은 노출장면과 배드신은 쿠르트의 본능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감독은 진실함이 가장 원초적인 호기심과 본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본 듯하다.
어느 날 쿠르트는 나무 위에서 들판을 바라보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말한다. “이제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다 알았어요. 세상의 비밀을 알았어요. 세상은 다 연결돼 있어요.”라고. 부모님은 그런 그를 보며 조현병을 알았던 엘리자베스(쿠르트의 이모)를 떠올린다. 예술가와 현실의 괴리가 느껴진다. 쿠르트는 내면의 질문에 좀 더 집요하다. 쿠르트가 그 날 보았던 진실이 무엇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인간은 더 깊이 삶에 대해 고찰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한 ‘세상의 연결’은 동양철학에서 접해 봤을 법한 이야기다. 그의 이런 깨달음(?)은 현대미술이나 그 후 쿠르트의 작품세계와 꽤 잘 어울린다. 뒤샹은 기성품인 변기를 ‘샘’이라는 미술 작품으로 만들었고, 잭슨폴락은 그리는 행위 자체를 미술로 승화시켰다. 예술이 모든 것과 연결되며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서양의 양자역학과 불교의 색즉시공이 연결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세상의 연결’은 지금의 우리에겐 이미 익숙한 생각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며 줄곧 집중된 것은 잔혹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예술가의 삶 자체였다.
어린 쿠르트가 세상을 보는 방법은 특이하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을 마주할 때면 가만히 손을 올려 시선을 가렸다 내린다. 그러면 초점은 빗나가고 세상이 흐려진다. 이는 훗날 사진회화를 그릴 때 ‘흐리기 기법’으로 발전한다. 그는 자신의 뿌연 그림을 통해 사람들 스스로가 진실을 찾아내길 바란듯하다. 그 의미는 전체주의적, 이념적이 아니라 개인적이길 바랐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전체주의적 가치가 아닌 개인의 가치와 의미를 갈망하게 됐다. 사진을 뿌옇게 그러놓으니 사람들은 그 불투명함 속에서 각자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다. 심지어 계단을 내려오는 임신한 아내를 표현한 사적인 작품까지도 관객의 의미가 투영된다. 그 그림이 뒤샹의 오마주냐고 묻는 기자에게 쿠르트는 미소 지으며 ‘그렇다’라고 답한다. 이미 작가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진실은 관객들 개개인에게 있었다. 그 그림의 재료인 사진은 작자 미상이어도 괜찮다. 아니 작자 미상이어야 한다.
사진이 객관적 사실을 보여준다면 그가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주관적 진실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뿌옇다. 오해와 편견들로 흐려졌고 이데올로기와 신념으로도 흐려진다. 심지어 언어와 종교를 통해서 진실이 더 멀어지기도 한다. 난 그의 뿌연 그림을 통해 우리가 찾아낸 진실이 과연 진실인지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뿌연 그림 자체가 우리가 피하지 말고 바라봐야 할 진실이지 않을까?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것들을 맹신하지 않고 조금은 너그럽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진실에 더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영화가 끝난 후 영화의 실재 모델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의 작품세계는 버라이어티 하다. 사진과 회화, 추상과 구상, 채색화와 단색화 그리고 사적(私的)과 공적(公的)의 경계를 넘나 든다. 특정 경향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경계를 추구하는 그만의 스타일은 독일 미술의 큰 흐름이 되어 또 다른 경계를 만들었다. 진실을 찾아가던 그의 작품에는 또 다른 개념들이 묻어나 진실을 더 뿌옇게 만들기도 한다. 그의 진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의 진실은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인듯하다. 영화에서 시대 상황이나 리히터의 철학 못지않게 그의 삶 자체를 비중 있게 보여준 의도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내가 그렇게 봤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영화가 끝나고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찾아본 후에는 오히려 그가 찾은 진실이 무엇인지 다시 헷갈린다. 그의 말대로 진실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일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은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마주할 순간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로또에 당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