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선명한 마추픽추

현대 세계 7대 불가사의

by 분의일



“생각보다 별로네…”


꿈에 그리던 마추픽추에 도착해서 처음 뱉은 말이다.

스위스의 알프스처럼 압도적인 경치도 아니었고,

이탈리아 건축물처럼 세련된 아름다움도 없었다.

안데스 깊은 산속에 감춰진 ‘공중도시’, 마추픽추는 내게 그저 조금 높은 곳에 남겨진 옛 마을의 흔적일 뿐이었다.


왜지?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아 와서일까?

아니면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거창한 수식어 때문에 너무 기대를 한 것인가?


사실 마추픽추가 유명한 이유는 외계인? 때문이다.

정확히는 ‘외계인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미스터리한 소문 때문이었다.

소문의 근거는 단순하다.

“어떻게 문자도 없었던 남미의 한 문명이 해발 2400m에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건축할 수 있었겠냐?”라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외계인은 마추픽추를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만들어버렸다.


마추픽추는 잉카시대의 유산이다.

잉카제국은 1438년, 파차쿠텍 황제 때 본격적인 제국의 형태를 갖췄다고 추정된다.

마추픽추도 그때 건설되었다.

잉카에는 문자가 없었고, ‘키푸’라는 매듭으로 간단한 기록만을 남겼다.

그래서 잉카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추정’이다.

1526년, 불청객인 스페인인들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혀

(키푸: 매듭문자?)


대항해 시대, 스페인 탐험가들은 황금을 찾아 신대륙으로 몰려왔다.

1521년, 코르테스가 지금의 멕시코 지역인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고

그로부터 12년 뒤인 1533년, 그의 사촌 피사로는 지금의 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잉카 제국을 무너뜨렸다.


놀라운 점은 이 정복에 동원된 스페인 병력이 단 168명.

잉카 군은 8만 명이었다.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돌과 청동 무기는 총과 대포를 이기지 못했다.

잉카인들은 말(馬)이라는 동물을 본 적도 없었다.

그들에게 말을 탄 하얀 얼굴의 스페인군은 마치 신화 속 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패닉에 빠진 잉카 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못한 채 무너졌다.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는 생포되었다.


전쟁에 패배한 잉카인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수십 년간 저항을 이어간다.

하지만 스페인 정복자가 가져온 것은 총과 칼만이 아니었다.

함께 넘어온 천연두와 홍역은 깊은 숲 속까지 침투했고 잉카의 인구 절반이상이 소멸하게 된다.

그렇게 안데스의 제국 잉카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숲 속 어딘가에 ‘잉카의 황금 도시’가 존재한다는 소문만이 전해졌다.


그로부터 3백 년 뒤 미국의 탐험가이자 역사학자인 하이럼 빙엄이 그 전설을 따라나선다.

그는 마추픽추 근처에서 만난 소년의 도움으로 이곳을 발견하게 된다.

하이럼 빙엄은 70장의 사진과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라는 글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기고한다.

그렇게 마추픽추는 세상에 다시 나온다.

(하이럼 빙엄과 소년)


발견당시 마추픽추는 지금의 모습과 달랐다.

3세기 넘게 사람이 살지 않았기에 온통 나무와 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근처를 지난다 해도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꼭꼭 숨어 있었다.

이 넓은 지역에서 일일이 풀과 나무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이 탐험가는 쉬운 방법을 찾아낸다.

불을 질렀다.

마추픽추를 덮고 있던 나무와 풀은 사라지고 도시의 석조 구조물만이 남게 된다.

그렇게 숨어있던 잉카의 도시가 세상에 드러났다.

물론 건물들을 덮고 있던 지붕 역시 다 타버렸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문화재 훼손행위다.

그 덕에 우리는 지금 지붕 없는 마추픽추를 감상할 수 있다.

(원래의 마추픽추 모습을 상상한 그림 - 출처:톡파원 25시)


나도 지금 마추픽추 앞에 서있다.

서울에서 꼬박 하루를 날아 지구 반대편의 리마에 도착했다.

다시 1시간 30분을 날아 쿠스코에 도착.

그리고 다시 잉카레일을 타고 1시간 30분,

셔틀버스를 타고 30분을 이동해야 마추픽추 앞에 설 수 있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처럼 목숨을 건 여정은 아닐지라도 꽤나 긴 여정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잉카레일, 표값이 20만 원이 넘는다)

(관광객들이 입장을 위해 검표소에 길게 줄을 서있다)


그러니 나만 보긴 아쉬운 이곳을 잠시 함께 둘러보자.


마추픽추는 크게 농업 구역과 도시 구역으로 나뉜다.

농업 구역엔 250개의 계단식 밭이 있고,

도시 구역에는 귀족의 주거지와 신전이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도시구역에 들어서려면 작은 입구를 지나야 한다.

지금은 나무문이 사라졌지만 예전에 이곳엔 나무문이 있었다.

라마 같은 동물이 도시구역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도시 구역 입구)

(지금도 마추픽추에 살고 있는 라마들)


도시 구역에 들어서면 사다리꼴 창과 기울어진 벽이 눈에 띈다.

지진을 견디기 위한 설계다.

접착제 없이 돌을 끼워 맞췄고, 접합 시 충격을 흡수하도록 돌 표면에 홈까지 만들었다.

철기 없이, 석기와 사암으로 갈고 깎아 정교한 마감을 했다.

레고처럼 끼워 맞춘 이 유적은 지금도 무너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사다리꼴 창)

(레고모양 돌과 충격 흡수 홈)


마추픽추는 신전이자 거대한 천문대였다.


태양의 신전은 하지(6월 21일)와 동지(12월 21일),

각기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 계절을 알려준다.

태양이 가장 높은 날인 하지에는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방의 모든 부분을 비춘다.

그날은 신전 안에 그림자가 없어진다.

태양이 가장 낮은 날인 동지에는 신전 안에 길고 뚜렷한 그림자 생긴다.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통해 농사의 리듬을 맞췄다.

(태양신전(가운데), 사진 우측의 계단처럼 보이는 곳이 농업구역이다)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인티와타나(Intiwatana)는 ‘태양을 붙잡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곳에서는 일 년에 두 번, 동지와 하지에는 해시계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그날은 자신들이 태양을 붙잡은 날이라 생각하고 기운이 가장 왕성한 때라 여겼다.

해시계를 기준으로 동서남북에 4개의 성스러운 산이 있는데 북쪽에 있는 산이 ‘젊은 산’이라는 뜻의 ‘와이나픽추’다.

반대로 ‘마추픽추’는 ‘늙은 산’이라는 뜻이다.

(가운데: 해시계, 좌측의 봉우리: 와이나픽추)


그 밖에도 도시구역에는 여성들만의 학교, 콘도르를 기리는 신전, 그리고 조상의 뼈가 발견된 성스러운 제단 등이 있다.


콘도르, 퓨마, 뱀은 잉카인들이 믿는 세 개의 세상(미래와 하늘, 현재와 땅, 과거와 지하)을 상징한다.

잉카제국의 유적 곳곳에 그 상징들이 숨어있다.

(위는 퓨마, 아래는 라마 모양의 각돌 조각)


마추픽추 전체를 위에서 보면, 콘도르가 날개를 펼친 모습과 닮았다.

잉카의 유적지는 여러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쿠스코는 퓨마, 오얀타이탐보는 라마, 피삭은 또 다른 콘도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우연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믿는 세상을 삶의 터전에 담아내고자 했던 의도일까?

(하늘에서 본 마추픽추 - 출처: 골라듄다큐)

(동물모양의 잉카 유적지들 - 출처: 골라듄다큐)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절벽 위에 마추픽추가 자리하고 있다.

왜 이 높은 곳에 자리한 것일까?

석재를 끌어올리기도 힘들고, 물도 계곡 아래에서 길어야 하며, 지진과 산사태까지 빈번했을 것 같은데?

도무지 도시를 세울 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는다.


태양신을 모시기 위해 높은 곳에 만들어졌다는 가설도 있다.

태양과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고 높은 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추픽추는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보다 1,000미터나 낮은 해발 2,400미터에 위치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면 정말로 외계인이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놀랍게도 최근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곳이 최적의 입지였다고 말한다.

마추픽추는 서로 X자로 교차하는 단층지대 근처에 위치한다.

단층지대는 과거에 지진 발생지역이었다.

지진으로 부서진 바위는 마추픽추의 벽과 기둥이 되었다.

땅이 갈라진 틈에서 솟는 샘물은 도시에 생명을 공급하였다.

경사진 지형은 배수를 도와 홍수에 강했다.

또한 은밀하고 험준한 이곳은 최적의 피난처(별궁)이기도 했다.


마추픽추가 이곳에 있는 것은 외계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한 과학과 자연 관찰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마추픽추를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


이집트의 피라미드, 페루의 나스카라인, 칠레의 모아이 석상등 대부분은 문서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장소다.

그리고 대부분 유럽인들이 미개하다 여겼던 곳들에 외계인설이 붙었다.


변변한 글자도 없었고 인신공양이나 하던 잉카는 정복자들에게 개화의 대상이자 말살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기독교 성당들이 잉카의 태양신전 위에 하나둘 세워졌다.

(꼬리깐차(태양신전) 위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성당)


인신공양의 문제점은 차치하고, 정말 잉카문명이 미개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투박해 보이지만 잉카의 석조건축기술은 현대의 기술과 비견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고지대에 최적화된 계단식 농지와 품종개량기술 역시 서양에 뒤처지지 않았었다.

(다양한 품종의 옥수수들)


어느 한 면이 부족하다고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의 청동대포가 영국의 함포에 무너져 아편전쟁에 패했지만 당시 청나라의 인쇄, 농업, 의학, 공예등 수많은 기술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 (물론 쇄국정책 등 여러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사람도 그렇다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운동을 잘할 수 있고.

둘 다 못하는 사람이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될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다고 해서 타인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스스로 좌절할 필요도 없다.

‘나의 장점도 단점도 나를 형성하는 수만 가지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이다.‘ - by법륜스님

트렌드는 변한다.

시대만 잘 타고나면 열성이 우성이 되기도 할터이다.

혹시 아는가?

언젠가는 키 작고 뚱뚱한 사람들이 런웨이를 주름잡는 날이 올지?;)


유럽인들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위해 잉카의 우수한 기술력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황금빛 탐욕이 문명개화라는 하얀 명분으로 희석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마추픽추가 미스터리인 것은 정복자의 새까만 계략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락은 매년 150만 명의 관광객을 마추픽추로 불러들이고 있다.

그러나 진짜 마추픽추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포장된 미스터리를 걷어내고 나서야 선명히 보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