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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연 Apr 19. 2023

결국은 관계, 관계, 관계

<길복순>, 그리고 변성현이 집착하는 관계성이란?

  변성현 감독은 과시적인 미쟝센 아래 파국을 맞는 인간들의 관계성을 다루는데 천착했다. <불한당>에서는 조폭 누아르의 장르에서 사랑과 배신이 연달아 벌어지는 난장판을 그렸고, <킹메이커>는 한국 현대 정치사를 바탕으로 정치물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경외하는 이에 관한 애증으로 스스로 파국을 맞이한 이의 고독을 그렸다. <길복순>도 마찬가지다. 킬러액션 장르를 가져다 썼지만, 장르적 재미보다는, 영화가 구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관계성을 그리는데 집중한다.



<불한당>은 누아르가 아닌 멜로에 가깝다.




  소위 ‘전도연 팬무비’로도 읽혀지는 <길복순>에서 청부살인은 ‘배우가 작품에 참여해 연기를 하는 행위’로 은유된다. “칼끝에 감정이 실려야해.“ 같은 대사, 살인을 행하기 전에 그 과정을 여러번 시뮬레이션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배우가 여러 번 테이크를 거쳐 좋은 연기를 찍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로 짐작해보건데 <길복순>은 배우 전도연의 메타영화다. 여기에서 길복순과 회사와의 관계, 후배간 관계 묘사를 통해 기업과 노동자, 배우와 엔터테인먼트 회사, 선배와 후배 배우 간 경쟁을 언급하며 ’공정한 경쟁‘이란 단어의 모순을 건드리기도 한다. 이는 현 세대가 중시하는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관한 변성현의 정치적인 발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살인은 배우들의 '연기'로 은유한다.



  여기서 <길복순>을 ’킬러 길복순‘이 아닌 ’엄마 길복순‘으로 바라본다면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게 읽힌다. 사실 길복순의 딸 재영의 동성애 자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재영의 성정체성은 ‘엄마 길복순’에게는 소수자에게 따르는 고난을 측은히 여긴다기보다, 딸이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확립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두려움에 가깝다. 상대방이 향하는 마음의 방향을 알아챘을 때 떨리는 두 눈을 잡아내는건 변성현 감독의 장기이며, 그건 이번 영화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길복순과 길재영, 길복순과 차민규, 길복순과 한희성 간 관계는 종종 어긋나며 여기에서 만들어자는 관계의 파열음은 이 영화의 특별함이다. 이 간드러지는 소리는 일방향적 사랑이 끌고 오는 비극에 관한 한탄처럼 들리며, 끝내 붕괴해버리고야 마는 일련의 과정들은 꽃이 지듯 처연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하다. 길복순이 딸과의 폐쇄적인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선택을 한 순간, 그는 필연적으로 다른 관계들을 청산해야 하는 비극을 맞닥뜨린다.


  물론 액션영화로서 <길복순>은 엉성하다. 이는 영화 속 액션을 펼치는 배우의 육체적 한계도 있겠지만 기존 액션영화들의 다양한 장면을 현실적 고민 없이 가져다 쓰려는 변성현의 과욕처런 느껴졌다. 몇몇 씬들은 영화가 지향하려는 분위기와는 맞지 않아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꽤나 만화적인 장면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길복순>에서 <우아한 세계>가 겹쳐보이는 장면들.


  

  하지만 세간의 불호와는 달리 <길복순>은 변성현 감독이 줄곧 잘해왔던 인물 간 관계성 다루기의 연장선이었을 뿐이었다. 각자의 진실을 숨기지만 끝내 문을 닫지는 않는 이 영화의 미덕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의 다음 작품에는 어떤 캐릭터들이 아름다운 파국을 맞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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