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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은 Sep 07. 2022

쌍봉사 일기 7/21(목):<사피엔스>, 새로운 카페

현대의 책들을 읽으며, <사피엔스>의 재밌는 주장들, 카페 '팔레트'

1

보편적인 담론들

책 여러 권 보다 보면 비교적 최근에 쓰인 책들에는 꼭 포함되는 비슷한 담론들이 존재한다. 진화론은 어느 책에서나 인용하면서 그 논리를 이용하거나 빗대는 일이 참 많다. 그리고 인간 행동의 비합리성, 그 이유로 우리의 뇌가 수 십만 년의 수렵채집 생활에 맞도록 진화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보인다. 과학혁명의 문턱까지 갔던 고대 그리스, 이를 다시 되돌려버린 기독교와 신비주의, 서구의 과학혁명이 바꾸어낸 세계와 현대는 그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읽었다. 다양한 사상들과 그 주창자들의 이름도 최근에 여럿 알게 되고 자주 보았다. 그러다 보니 책에서 어느 단락들은 읽다 보면 ‘다음에 이런 얘기를 하겠구나’ 미리 예상되는 지점들이 있다. 이런 얘기들도 더 많은 책을 보고 더 편견 없이 읽을 수 있다면, 공통된 이야기 속 저자가 하고 싶은 세부적으로 다른 이야기들이 더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2

무지에 대한 깨달음, 과학혁명의 시작

어제부터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데 재밌는 주장이 하나 있다. 서구의 과학혁명은 무지에 대한 깨달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의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무지함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그 이전의 인식에서는 이상적이고 최상의 상태는 과거에 존재했으며, 이 과거의 이상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거에 작성된 최고 권위의 책들을 보고 공부하고 이를 따르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필요한 중요한 지식들은 성경, 불경, 논어, 사기와 같은 과거의 책에서, 혹은 사제에게 물어서 알 수 있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모르는 것이 당연한 필요 없는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거미를 예로 들었는데, 과거에 인간들은 거미가 어떻게 거미줄을 치는지 몰랐지만 이는 인생에 아무런 필요가 없는 지식이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관에서 성경에 나오지 않고, 사제들도 전혀 모르는 거대한 미지의 땅 신대륙이 발견된 것이다. 그 이전 시대의 지도들과는 달리 아직 알지 알려지지 않은 지역들이 비어있게 표시된 지도들이 만들어지고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부분을 보고 예전에 와우라는 게임을 할 때가 떠올랐다. 그 이전의 다른 게임들과는 달리 와우의 지도에선 내가 가보지 않은 지역이 안개에 가려져 제대로 표시되지 않지만, 그곳에 미지의 땅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게임을 할 때 나는 특별한 이유 없이 지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와우를 했을 땐 게임 속 지역 여기저기를 단순히 탐험만을 위해서 다녔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명백히 존재한다는 지각은 그 모르는 것에 대한 탐구 욕구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장소에 대한 무지의 깨달음은 차츰 자연 전체에 대한 무지의 인식으로 퍼져나갔다. 이전까지는 순전한 우연의 발견에 의해 과학이 발전했지만, 무지의 인식은 명확한 탐구 대상을 인지할 수 있게 만들었고, 더 나아가 과학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간 생각지도 못해본 새로운 시각이었다. 나는 현대를 사는 사람이기에 과거 사람들의 삶을 온전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우 사소할 수 있는 무지에 대한 인식이라는 작은 차이로 생각이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이 책을 읽으며 생겨났다. 비슷하게 미래에서 현대의 나와 세상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매우 사소한 차이로 어떤 관념에 갇혀서 지내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3

<사피엔스> 속 다양한 이야기들

<사피엔스>는 또 다른 새로운 시각들을 알려준다. 저자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역할이란 부분도 그랬으며, 자본주의는 명확한 법과 민주화된 정부 아래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그렇다(이 부분은 생각해보니 예전에 한 친구가 얘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알려준다. 종교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먼저 그는 스스로 종교에 대한 정의를 내리며, 현대의 보편적 사상이라 여겨지는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도 종교라 볼 수 있다고 하는 등 그간 우리가 종교라 생각하지 않은 대상들도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마지막으로 불교에 대한 간결한 설명도 흥미를 끈다. 설명을 보면 석가모니의 철학이 조금 사소한 것처럼 느껴지도 하지만, 또 불교를 인간에 대한 가장 보편적 가르침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나의 시각과 같이 현재 종교로서 불교는 이런 깨달음에 대한 부분보다는 기원과 숭배의 모습을 많이 가진다 하였다.




4

카페 '팔레트', 쓸데없지만 재밌는 상상

카페에 와서 앉아있는데 재밌는 상상을 했다. 상상의 시작은 내가 나중에 어떤 과정을 통해 유명해진다면 이었다. 이어진 생각은 나나 지금 카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데, 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를 유명하게 만든 책에 어떤 실존하는 식당을 묘사하였다 하자. 그 사람은 그 식당에 대한 혹평으로 내용을 채웠는데, 문장이 매우 재밌고 그 작품이 유명해져 사람들이 그 식당을 찾는 일이 많아졌을 것이다. 책에 나온 묘사들을 현실에서 발견하며 사람들은 재미를 느끼고, 책의 혹평에 따른 리뷰들이 마치 칭찬인 듯 쌓여가며 계속해 별점이 낮아져 갈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낮아진 별점에도 계속해 가게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가게의 주인은 혹평을 의식해 책에서 묘사된 특징들을 고쳐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니 그냥 피식피식 재밌어졌다.


위 내용과는 관계없이 나는 이 카페가 마음에 든다. 매번 가던 ‘열두시오분' 카페 주변에 있는 ‘팔레트'라는 카페인데 조금 특이하다. 카페의 겉모습은 시골의 한적하고 여유롭게 꾸며진 이쁜 카페인데, 내부를 들어와 보면 배치된 테이블 모습이나 메뉴가 뭔가 이질적이다. 주변에 중, 고등학교가 있어 학생들이 학교가 끝나고 와서 둘러앉아 이것저것 사 먹는 분식집 역할도 어느 정도 해서 그런 건가 싶다. 아무래도 교통량이 거의 없는 시골이다 보니 일반적인 카페로만 운영해선 안 되겠구나 생각된다. 나는 바닐라라떼를 시켰는데 음료에 아이스크림도 들어가고 간식도 넉넉하게 주시는 데다 조금 오래 있으니 복숭아도 깎아주셨다. 아주머니가 아주 친절하신데 자리도 편안하여 기분이 좋다. 카페 밖에는 고양이를 위한 물품들이 있는데, 조금 앉아있으니 못 생긴 길고양이가 와서는 가게 주변을 왔다 갔다 한다. 재밌는 카페다. 그나저나 요즘은 복숭아 철인가보다. 차 타고 지나가면 여기저기 길에서도 복숭아를 팔고 있고, 방에도 이전에 지냈던 분이 복숭아 하나 남겨두고 가셨고, 여기서도 하나 깎아주시니 말이다.


카페에 앉아있는데 내 결혼식 축가로 형준이가 불렀던 ‘여름밤에 우린’ 노래가 나와서 오랜만에 결혼식 생각나며 기분이 매우 좋다.




5

밈(meme)

<사피엔스>에는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도 나온다. 적자생존의 주체인 유전자가 진화하는 경로에 한 개체 개별의 행복은 전혀 관련이 없다. 여러 개별 단위의 유전자들이 스스로의 복제품을 더 많이 오래 남기도록 하는 압력만이 존재한다. 그 유전자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그런 결과가 일어나도록 하는 논리적 인과관계만이 존재한다. 인간 사회의 여러 제도나 문화, 담론, 사상과 종교 같은 무형의 개념들도 모두 그러한 특성을 똑같이 따른다. 그래서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이러한 가상의 실체를 유전자(gene)의 이름을 따다 밈(meme)이라 이름 붙였다. 역사의 진보가 개개인의 행복이나 안녕을 장담하진 않는다.





6

<사피엔스> 속 불교의 행복관

책에서 다시 행복과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역사적으로 행복에 관한 가장 독특하고 새로운 형태의 고찰은 불교의 것이라고 얘기한다. ‘네가 하고 싶은걸 하라'라는 현대의 자유주의적 사상과는 정 반대에 있다. 쾌락에 대한 추구와 고통에 대한 회피에 집착하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일시적인 감정의 추구에만 빠져 인생 전체가 불만족과 긴장 속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즐거운 감정 자체가 일시적일 뿐이며 이를 깨닫고 갈망을 멈추는 것 만이 인생을 지배하는 불만족을 버리고 일상적인 다양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짧은 쾌락을 대신에 현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살라고 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란 것이다.




7

남은 책들

<사피엔스>를 다 보았다. 앞으로는 책에서 읽은 얘기들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내 속에서 생겨나는 생각들을 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다. 일단은 이 책에 관해서는 두고, 이제 남아있는 책 리스트를 보자. 책은 여러 권 남았는데, 생각보다 읽을게 얼마 남지 않았다. 칸트 책은 포기했고, 비슷하게 쇼펜하우어 책도 좀 나중에 읽을 생각이다. 남은 것들은 니체 책들(<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상의 황혼>, <도덕의 계보>), <노자>, <숫타니파타>,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제로투원>, <룬샷>, <과학적 관리의 원칙>, <인간 존재의 의미>, <마음을 쏘다 활>, <트리스탄과 이즈>, <페스트>,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이렇게 남았다. <과학적 관리의 원칙>, <인간 존재의 의미>, <마을을 쏘다 활> 이렇게 세 권은 굉장히 얇아서 아마 금방 다 읽을 테고 숫타니파타는 조금씩 틈날 때마다 조금씩만 읽을 생각이라 남은 게 몇 없다. 남은 기간이 2주가 넘는데 만약 다 보고 나면 뭐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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