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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은 Sep 08. 2022

쌍봉사 일기 7/23(토):<과학적 관리의 원칙>

사소한 연구에서 세상을 바꾼 이론으로, 하루의 불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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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책들

어젯밤 <과학적 관리의 원칙>까지 다 읽고 잤다. 어제 <마음을 쏘다 활>, <인간 존재의 의미>, <과학적 관리의 원칙> 이 세 책을 다 본 것이다. <과학적 관리의 원칙>은 사실 대학생 때 이미 수업으로 이미 접해본 책이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수업을 들으면 수업 내내 졸았기에 그 내용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책을 보니 그 당시 시험을 치기위해 공부했던 내용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내용이 재밌다. 이 책은 ‘과학적 관리’라는 분야 더 나아가 산업공학과 경영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F. W. 테일러가 쓴 책이다. 책을 보면서 이 테일러라는 사람의 삶이 학술계나 글쓰기와는 크게 가깝지 않은 공학자 출신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 당시 수업을 들을 때 상상했던 테일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던 저자이기에 글의 내용도 다소 딱딱하고 전개가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데다 읽다보면 내용도 상당히 생략되어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가 처음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적용하며 시험해본 시스템이 결국 평생에 걸쳐 여러 작업장들에 적용한 과학적 관리 시스템으로 발전했고, 자신의 시스템에 대한 잘못된 적용을 막고 여러 문의에 응답하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런 그의 시스템이 발전해 산업공학과 경영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시초격이 되었다는게 재밌는 사실이다.




2

<과학적 관리의 원칙>을 읽고

<과학적 관리의 원칙>은 내용이 짧지만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1911년에 출판되었는데, 당시의 생산 현장 전체가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비효율로 가득차 있음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테일러는 과학적인 작업의 분석과 훈련을 토대로 효율적인 생산과정을 이끌어낸다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렇게 보면 생산의 효율을 위한 비인간적인 도구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법을 제시한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의외로 그는 방법론 보다는 철학과 노사 양측의 의식 변화를 더욱 강조한다. 그렇기에 그가 직접 그의 원칙을 적용했다는 작업장들에선 이전과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생산성 향상을 이뤘으면서 동시에 수 십년간 단 한차례도 파업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원칙이 적용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전과 비교하여 심리적 안정, 일에서의 보람, 삶의 질, 수입 이 모든게 향상되었다고 한다.


그는 생산 현장의 비효율로 인해 사회의 많은 자원들이 낭비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가 책의 시작부터 강조하는 것이 생산성 향상을 통해 기업의 이윤확대 뿐 아니라 노동자, 기업가 모두 혜택을 받으며 또한 낮아진 제품의 가격으로 인해 사회 전체에 더 큰 혜택이 돌아간다고 한다. 그는 이런 과학적 관리가 산업혁명 이후의 인류에게 또 다시 큰 진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책을 보면 이론은 매우 사소한 연구에서 시작한다. 손으로 선철을 들어 나르거나, 삽으로 석탄을 옮겨 담는 것과 같은 사소한 작업에서 ‘적합한’ 노동자가 하루에 행할 수 있는 ‘적정한’ 작업량이 얼마인지, 한번에 얼마나 옮겨야 하는지, 일과 휴식의 간격은 어떻게 해야하는지와 같은 연구가 그 시작이다. 그가 바라본 미래나 목적은 ‘산업혁명’과 같이 사회에 큰 변혁을 주는 모습이지만, 그 시작은 이토록 사소해보이고 단순한 연구였다는 것이 하나의 큰 시사점이라 생각한다.


책 속에 재밌었던 하나의 연구결과가 더 있어 쓴다. 한 달 뒤 혹은 1년 뒤에 약속받은 상여금에 비해 내일 바로 얻는 칭찬과 격려가 개인의 동기부여에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진위여부를 떠나서 생각해볼만한 부분이다.




3

절의 꿀벌들

절 내에 꿀벌집들이 여기저기 있다. 건물의 처마 아래 작게 난 틈을 통해 숨겨 지어진 꿀벌집을 여태까지 셋 발견했다. 공양간을 가는길에 보면 언제나 벌집 입구에 꿀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앞을 말벌 한,두마리가 제자리비행을 하며 눈치를 보고있다. 한번 씩 말벌이 간보듯 가까이 가면 위협하듯 꿀벌들이 날개짓으로 파도를 타며 어떤 무늬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말벌이 꿀벌집 입구 앞을 비행하며 있어도 밖에서 일하는 꿀벌들은 큰 문제없이 입구를 잘 지나다닌다. 정말 신기하게도 이런 모습을 매일같이 볼 수 있다.


꿀벌들은 자세히 보면 유튜브에서 볼 수 있던 양봉 꿀벌과는 달리 몸집이 작다. 아마 토종꿀벌이지 싶은데, 토종꿀벌이 오랜 시간동안 이 땅에서 말벌과 같이 진화하며 살아왔기에 말벌에 대한 대응을 잘 한다고 하던데, 그런 모습을 나는 매일 보고 있다. 이렇게 작은 꿀벌들이 어떻게 장수말벌들 까지 상대하는지가 신기할 따름이다.




4

불만족스런 하루와 잠, 죽음

요즘 휴대폰으로인해 시간이 많이 뺏긴다. 특히 오늘 하루종일 사회에서 지내던 것 처럼 본분을 잊고서 딴짓들만 하게 되었다. 내가 보고싶지 않다 생각해도 습관적으로 폰을 집어들고 보기 시작하면 이를 내려놓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오늘은 <노자>를 읽고 있었는데 너무 졸리다보니 계속 중간에 폰을 집어들고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내랑 통화를 하고서는 폰 내려놓고 <노자>를 다시 보다가 잠자기 전인 지금 일기를 쓰고 있다. 그래도 다행인건 있다. 절에 오기 전이라면 이렇게 불만족스럽다 생각하는 하루를 보낼 땐 하루에 대한 미련으로 잠에 들려고 하질 않았다. 그런날 결국 잠에 들지않고 무엇이든 만족스레 하고서 편하게 잠든적 있냐하면 단 한번도 없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오늘의 삽질과는 별개로 조금 있다가 자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드니 저번에 니체의 책에서 봤던 글이 생각난다.


밤에 잠에 늦게 드는 사람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니체는 하루의 끝인 잠을 대하는 태도가 삶의 끝인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같을 것이라 했다. 하루에 미련이 남아 잠을 못이루는 사람은 결국 죽음 앞에서 인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죽음을 거부하려 발버둥 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보면 그간 나는 나의 마음 속에 정의한 어떠한 ‘만족’을 하루마다 찾으려 했고, 대부분의 날에서는 이를 찾지 못해 하루를 편히 보낼 수 없었다. 아마 이대로의 나였다면 죽음 앞에서도 인생의 만족을 절대 찾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었을테다. 그래도 이제는 만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족을 찾는 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게 아닐까 섯불리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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