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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은 Aug 30. 2022

쌍봉사 일기 7/10(일):진실함과 문명의 끝에 대해

<상도>, 스님과의 차담, 진실함, 모험의 끝에서

1

<상도>, 새로운 자극


어제저녁부터 소설 <상도>를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 소설은 확실히 책 읽는 것 자체가 재밌어서 쉬지 않고 계속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일기 쓰는 게 갑자기 손에 안 잡힌다. 절에 오면서 여러 자극원들을 없앴는데 소설책이 그런 자극원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 평소 사회에서 겪는 것들에 비하면 훨씬 자극이 약하고 내 뇌의 주도가 강한 행동인 것 같다. 비슷한 또 다른 건 밖에 운전하고 나가서 카페를 가는 것인데, 운전 자체도 즐거운 자극 중 하나인 데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 이벤트 등이 다 자잘한 자극들이기에 카페 가는 것은 조금은 지양해야겠다.




2

나 왕따인가


어제저녁을 먹으러 공양간을 갔는데 식당에서 일을 조금씩 도우시는 할머님 외에는 밥 먹는 내내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 마침 밥 다 먹고 나와보니 절 앞에 주차되어있던 차들이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다 같이 나만 두고 외식하러 갔나 싶다. 나만 모르는 여기 사람들 간의 활동이나 모임이 있는 걸까?




3

잠들기의 어려움


어젯밤에도 결국 잠을 제대로 못 들었다. 어제 아침에 늦게 일어났었기에 늦게 잠들거라 생각하고 취침시간이 지나서 11시까지 <상도>를 보다가 누웠는데 정신이 너무 멀쩡하여 잠이 전혀 오질 않았다. 계속 잠에 들지 못하고 누워있다가 신발 신고 나가서 조금 걸었다가 화장실도 갔다 오고 다시 앉아있다가 반복하다 새벽 1시까지 잠에 들지 못하고 현타가 와서 다시 <상도>를 펴서 읽다가 2시가 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잠을 자는 것도 점점 자극에서 멀어진 게 익숙해지며 나아질 수 있을까?




4

<상도>와그 속 대화방법


다시 쓰지만 <상도>는 재밌다. 모험적인 내용에 전형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인공의 성공스토리로 되어있어 흥미롭게 읽힌다. <상도>는 동양의 옛날 책들처럼 등장인물들이 서로 다양한 은유를 이용한 대화가 참 많다. 이쯤 되어서 의문인 것이, 과거에 사람들은 진짜로 저렇게 고사를 이용하고 임기응변적인 은유로 대화를 나누었던 걸까? 저런 방식으로 대화하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을까… 대화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너무 치중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에 끼지도 못하지 않나 싶다. 문학작품 속에서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재밌는 장치 정도로 쓰이는 것이지 실제 생활은 안 저랬겠지?




5

스님과의 차담


낮에 방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데, 방 문 앞에서 누군가 쉬시냐며 말씀을 거신다. 문 밖을 보니 스님 한분이 계셨고 시간 괜찮으면 커피를 마시며 차담을 하자고 하신다. 나를 데리고서는 다른 방들도 다니시며 같이 커피 드실 분들을 찾는데, 신기하게도 스님도 누가 어느 방에서 템플스테이로 지내시는지 모르신다. 따로 종무소에서 스님들께 알려주지 않으시나 보다. 스님 지내시는 방 앞에 계시는 분들 중 아기를 낳고 부부가 같이 아기와 두 방에 나눠서 지내고 계시는 분들은 육아로 바쁘셔서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평소 둘이서 같이 다니시는 젊은 여자분 두 분이 차담을 하러 오셨고, 두 분이 평소 예불을 같이 참석하는 젊은 남자분 한 분을 아래쪽 방에 가서 데려오셨다. 스님이 앞에 앉아 커피를 내리시고, 넷이 그 앞에 앉아 잡다한 대화를 스님과 조금씩 나누었다. 이 스님은 매일 식사 때 보이시고 언제나 몸을 가볍게 움직이신다는 느낌을 주는데, 어떻게 보면 스님 같은 근엄함이나 무게감이 없게 보이기도 하고 소탈하고 스스럼없이 보이기도 하던 분이다. 어제였던가 오늘이었던가 내가 쓰는 공용 샤워실도 누군가 깨끗이 청소해뒀는데 그것도 이 스님께서 하신일인 거 같다.


무튼 차담을 하며 다른 템플스테이로 지내시는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님이 가볍게 나한테 몇 가지 질문 주셔서 답하다가 명상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가 나오니 스님이 그에 대해서 좀 알려주시려 하시고 얘기를 이어 나가셨다. 스님들이 평소 수행을 하시는 게 명상과 관련이 많았다. 나는 선입견상 스님들이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직접 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깨달음을 위해 수행을 하는 시간이 매우 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일 년에 일정 기간 동안 여러 절에서 승방을 운영하고, 승방에서 스님들이 하루 네 번 각 2시간씩(총 8시간) 좌선을 하며 깊고 집중한 명상을 통해 깨우침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계신다 한다. 깨우침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나 분파 혹은 지역 전통들로 만들어진 갖가지 명상법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스님들도 많은 듯 보였다. 예로는 서울대 교수 누군가 자신의 연구 방법에 대한 고찰로 쓴 <몰입>이라는 책의 내용이 우리나라 불교의 명상 수행법과 근본적으로 유사하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배울 게 있다고 여겨, 그 교수가 기독교인임에도 서울의 어느 절에 초청해 강연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불교라는 종교는 믿음이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정신이나 초월에 대해 파고드는 부분이 다른 종교들과는 참 다른 부분이라 생각된다.




6

솔직함에 대해


진짜로 진실하고 솔직하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 스스로도 그렇고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둘러봐도 그렇다. 거만, 오만도 아니고 강박적인 자기기만이 아닌 진짜로 진실한 사람은 누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술을 마시면, 자신은 솔직한 게 좋고 매우 솔직하다고 강하게 말하는 한 친구도 사실 오만과 강박의 자기기만을 가지고서 그 가면 위에서 솔직하게 말하는 듯 보일 때가 많다. 직접 본인과 이런 부분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지만,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쉽지 않다. 내가 하려는 얘기를 상대가 온전히 받아들이고 명확한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위 얘기처럼 상대가 강한 의사를 가진 부분에 대해 반대 의견을 오해 없이 전달한다는 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언젠가 노력해봐야겠다.


무튼 남 얘기도 했지만 나도 같다. 나 또한 아직 강박적인 자기기만을 가지고 있고, 부당한 피해의식으로 나를 속이기도 한다. 심지어 이 일기에서조차 최대한의 진실한 내 얘기들을 쓰는가? 하면 아니다. 내가 여기다 거짓말을 하며 생각하지도 않은 남의 의견을 빌어다 내 생각이라고 쓴다는 건 아니다. 기만과 거짓의 범위는 매우 넓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떠한 생각을 글로 쓸 때, 그 생각이 나의 깊은 본심 속에서 생겨나서 나의 이성으로 그 본심을 해체해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정리해 작성한 글이라면 내 진실한 생각을 썼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가진 밑바닥 자아, 사회로부터 부여받아 내 것이라 덧씌운 나의 도덕관, 가치관, 고정관념의 위에서 어떤 현상에 대한 이성적 사유나 논리적 의견을 쓴다면 이것은 내 진실한 생각이라 할 수 없다. 내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사상과 가치관이 나의 뇌 속 논리회로를 빌려 언어, 글로 써내고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거기에 사람은 살아가며 이성적으로 붙들지 않는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다양한 무의식의 사유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가지만 이를 자신의 생각이라 말하는 경우는 없다. 나 또한 그런 생각들을 말로 하거나 글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얼마 전 ‘안나' 예고편에서 ‘사람은 자기가 쓰는 일기에도 거짓말은 씁니다’라는 문구가 나왔었는데 크게 공감이 가면서 계속 생각난다.




7

인간 문명 발전의 끝에 도달했을 때, 모험의 끝에서


인간 문명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지식의 탐구를 끝내고, 세계 모든 곳에 관한 탐험을 끝냈을 때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 고민해보면 아래 네 가지의 사상? 신념? 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 생각된다.


첫 번째는 무제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이며, 두 번째는 더 이상 세상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허무함에 빠져드는 모습을,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를 뛰어넘어 정신적인 초월을 추구하고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허무주의를 넘는 다른 방법으로, 현재 세대에선 모험이 끝났지만 이후 세대에 새로운 모험을 전해주기 위해 지금껏 쌓아 올린 문명과 지식을 스스로 완전히 파괴하려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은 모든 세상의 지식을 알게 된 마지막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인류 스스로 벽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함을 느끼는 상황일 때도 나올 수 있다. 수학에서 보면 여러 휴리스틱 한 방법을 통해 근사해를 구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런 방법들의 허점으로, 해를 찾는 과정에서 국소 최솟값에는 도달했지만 전체 최적해가 아님이 명백하면 해를 찾는 과정을 되돌려 초기값을 바꾸거나 알고리즘을 바꾸어야 한다. 인간이 가진 지식체계도 점진적 발전과정을 가진다. 어느 순간 인류 문명이 무너질 미래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예견 가능하고, 그 멸망 이전에 새로운 돌파구가 발견될 확률이 보이지 않는다면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험의 끝에서 일어나는 인간 문명의 모습을 예측해 보는 건 현실에서도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네 가지 사상들 중 특히 마지막 사상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데, 이 주장 자체는 다소 급진주의적이라 실제로 주창되고 주류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인류의 상황을 위에서 얘기한 벽에 가로막힌 상황으로 해석하고서, 지금의 현실을 이끄는 주도적인 사유를 조금만 비틀어도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다. 현재 기후 위협이 더욱 가속되고 이를 되돌릴 수 없는 시점까지 남은 시간 동안 이를 타파할 새로운 과학기술, 사회체제의 전환이 없을 거라 주장하는 조직들은 이처럼 주장할 수 있다. 초기값(인간의 유전적 본능)과 알고리즘(사회체제, 과학기술 체계)을 우리가 직접 바꿀 순 없기에 자연에 의한 새로운 시도를 위해 문명의 완전한 퇴보를 얘기하는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이런 주장이 충분히 나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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