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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은 Aug 30. 2022

쌍봉사 일기 7/11(월):인생의 목적과 결과의 차이

<상도>, 플라톤의 <국가>

1

<상도>, 인생의 의미와 자족


어제는 모처럼 잠에 잘 들었다. 오늘 아침엔 조금 늦어 7시에 일어나 혹시나 아침을 먹을 수 있을까 하고 공양간에 갔는데 다행히 밥이 아직 있었다. 밥을 먹고, 방에서 <상도>를 계속 읽었다. 전체 세 권의 책 중 마지막권의 중간을 넘어가고 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인 임상옥의 모험은 이제 끝이 나고 그의 인생 막바지 깨달음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책의 곳곳에 저자의 생각들이 많이 녹아 있는데, 예전에 읽었다면 그냥 가볍게 ‘교훈적이네' 생각하고 넘겼을 것 같은 내용들도 지금 읽으니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그중에서 임상옥이 몇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 욕망의 끝은 만족이 아닌 자족이다'라고 하는 깨달음을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 말 또한 예전이었다면 자기 최면적이고 기만적인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해’의 의미로 이해했겠지만, 이제는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욕망과 갈구는 끝이 없으며 인생의 충만함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에 있고,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얻는 결과 혹은 도구일 뿐인 돈이나 명예가 인생을 투자해 추구할게 아니란 사실이다. 책에서는 꾸준히 사회의 일반적인 시선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닌, 각자의 인생의 의미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는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이 좀 들었다.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을 얻거나,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회에서 부여한 가치를 내버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와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깊은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다. 사유의 시간과 여유 혹은 능력이 부족한 많은 사람들은 위의 것들을 대신해 이미 사회에서 만들어진 어떠한 거대한 신념, 논리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체계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아 평화롭고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체계의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와 같은 종교라 생각한다. 이렇게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따른다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들은 성경과 목사가 모두 제시해주며, 그에 따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들이 보증하는 의미 있는(천국을 가는, 회개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책에도 그런 천주교인의 모습이 더러 나온다. 물론 그중에도 종교에서 부여하는 의미를 뛰어넘어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더욱 확장적으로 추구하며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단순히 어떤 신념체계를 ‘믿어라'고만 얘기하는 것은 그 말을 듣는 상대방 삶의 주인을 외부로 내맡겨라 말하는 것으로, 상대를 낮추고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조금 전 내가 ‘예불에 한 번씩 참여해보고 싶다’ 얘기했을 때, 한 스님께서 그러지 말고 믿고 다니시라 말씀하시던데 불교도 이런 신앙적 측면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2

산책과 달리기


<상도>를 다 읽고서 여운이 남아 잠시 산책을 나갔다. 햇빛도 구름에 가려져 시원하고 기분도 모처럼 좋아서 도로를 따라 저수지 끝까지 뛰고 돌아왔다. 절에 오기 전 발목을 다친 게 아직 다 낫진 않았지만, 걷거나 뛸 때는 괜찮아서 좀 많이 뛰었는데 큰 문제는 없겠지? 모처럼 달리고 왔더니 기분은 굉장히 좋다. 그런데 왕복으로 거의 3km 거리를 갔다 왔는데 도로에 지나가는 차는 2대밖에 보질 못했다. 정말 한적한 시골이다.




3

플라톤의 <국가>, 인생, 목적과 결과의 차이


플라톤의 <국가>를 읽다가 재밌는 대목에서 생각이 이어져서 글로 좀 써보겠다. 정의란 무엇이고 정의는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 중 글라우콘의 질문이 재밌었다. 정의를 추구했지만 실패한 결과를 얻어 사회적으로는 부정한 사람이라 손가락질받는 경우가 생길 수 있고, 부정함을 추구했지만 성공한 결과를 얻어 사회적으로 정의로움을 칭송받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대상과 그 결과가 뒤바뀌는 경우라도 우리는 정의로움을 추구해야 하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보고 나도 가지던 의문이었기에 플라톤이 어떻게 대답할지가 너무 기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이에 대해서 고민이 되어 생각을 이어나가 보았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 갑자기 예전에 크게 느끼는바 없이 읽었던 책 <이방인>이 떠오르며 생각이 정리가 되었다. <국가>에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경우를 말했지만, 이 논의와 맥락이 다르지 않으면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고치겠다. 정의와 부정의 추구에 대한 대립은 - 개인이 설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 vs 사회에서 성공이라 통용되는 ‘결과물’(돈, 명예, 권력 등)을 추구하는 것의 대립으로 얘기할 수 있다. 동기(목적)와 결과 중 어느 것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대립을 말한다. 글라우콘의 질문 중 전자의 경우 동기와 목적을 추구했지만 좋지 못한 결과물을 얻어 그 동기나 목적마저 사회로부터 의심받는 경우이고, 후자는 결과를 추구해 이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고서 그 동기에 대해선 기만을 통해 사회를 속여낸 경우이다.


인생의 의미를 목적에서 찾고, 그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생의 과정임을 아는 사람은 그 인생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결과’를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써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다. <이방인>에서 주인공은 살인을 저지르고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의 과정에서 살인의 동기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주인공은 단지 ‘태양이 너무 뜨거워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감정에 솔직한 것)를 따르다 사형을 당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그 결과를 아무렇지도 않게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장되고 극단적이지만 예전에 읽었던 이 <이방인>의 이야기에서 오늘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명확히 그려졌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사회에서 제시하는 도덕관, 가치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 했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가치가 사회로부터 용납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결과(핍박, 비난)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나는 사회를 바꾸고 싶은지’ 혹은 ‘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지’ 나의 가치에 따라 결정하며 살아가면 된다. 단지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치와 목적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 스스로 글라우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낸 후, 플라톤(소크라테스)은 어떤 대답을 했을지 궁금해하며 계속 읽어갔다. 그런데 뭔가 전개가 좀 답답하다. 개인의 경우에서는 판단하기 어렵다며 갑자기 국가의 경우로 옮겨가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




4

불교에 대한 의문


붓다의 말을 따르면, 자신이 무언가를 가르친다기보단 상대방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하였다. 내가 읽었던 책에서는 그런 얘기들을 보았고, 스님들도 하루 8시간이나 되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한다 하였다. 그런데 왜 전체 불교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신자들은 그런 태초의 가르침이랑은 매우 동떨어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복을 비는 행태를 보이는 걸까?  앞의 일기에서 한 스님이 나에게 ‘믿고' 예불에 나오라 하신 것도 그렇고, 오늘 예불에 참석했을 때 형식적인 암송에 따라야 하고 기도를 통해 소원을 빌라고 하실 때도 이런 의문이 계속 생겼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스님들조차 수행을 오랫동안 하고서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하셨다. 깨달음만을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노력하는 스님들조차 그 경지에 다다르기 어려운데, 시간적 여유나 수행방법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반 신자들은 당연히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더 어려웠을 것이다. 붓다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쳐 깨달음에 이르게 만들 수 있었지만, 이후의 사람들은 대부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상도>에서 보았던 천주교의 신자들과 같이 인생의 의미에 관한 평화를 얻고, 사는 내내 믿고 따를 신념체계의 필요성이 있었기에 이를 위한 종교로서 변화와 발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5

스님과 명상법


어제 차담을 나누었던 스님이 따로 나를 부르셔서 여러 가지 따라 할 수 있는 간단한 명상법들을 알려주셨다. 스님이 매우 열린 태도로 나를 대하신다.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수행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스님들이 어떤 목표로 좌선을 하는지 그 과정이 어떤지 그리고 처음에 내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간단한 명상법들도 편하게 알려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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