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아팠던 일들로 나는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꾸만 순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겠지 했었는데,
어느 순간 나를 보니 방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돌아섰는데 내가 방금 무슨 얘기를 했는지 정말 조금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친한 동생들과 약속을 내가 잡아놓고는 그 약속을 잡았었다는 기억조차 아예 나질 않았다.
그제야 ‘아... 나 많이 아프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친한 동생이 건넨 이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미국에 있게 만들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자꾸만 방금 내가 했던 말조차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영어단어라도 외우기 시작하면 나아질까 하는 마음에 같이 학원을 다니자고 했지만 서로 집이 멀다 보니 우리는 각자 다니기 편한 영어 회화 학원으로 다니기로 했다.
왜 그리도 열심히였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립 중학교 3년을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던 나였지만 중2 때 이미 나는 영어를 포기한 '영포자'였다.
나도 영어를 잘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재미가 없었고,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만큼 고욕스러운 일도 없었다. 그랬던 내가 서른이 넘어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기억력을 되찾겠다고 시작했던 영어회화는 정말 열심히도 공부했다.
그때 나는 직장을 다니던 때였고, 퇴근 후에는 힘들 것 같아서 새벽 5시에 일어나 매일같이 첫 전철을 타고 영어학원을 다녔다.
그렇게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6개월을 다녔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영어학원에서의 수업을 단계별로 마친 후, 마지막 하나 남은 단계가 바로 실전에서 써보는 것이었는데 나는 학원 선생님 말고 진짜 원어민 하고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원 수강을 더 연장하지 않았고 직접 원어민을 찾아보기로 했었다.
당시엔 언어교환을 하며 서로가 공부하고 싶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카톡이나 라인을 통해서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동시에 페이스북에서도 쉽게 외국인 친구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페이스북 외국인 친구 만들기 페이지에 부족하지만 영어로 내 소개 글을 올렸고, 영어회화 공부를 위해 미국 원어민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짧은 글을 적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보다 많이 어려 보였던 외국인처럼 생긴 남자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자기는 미국에 살고 있으며 페이스북에서 나의 소개글을 보고 메시지를 보냈다고.
나는 이상한 남자들의 메시지들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어린 학생처럼 보이는 남자의 메시지를 읽으며 이 사람이라면 영어공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는 카톡아이디를 교환하고 카톡과 페북 메시지를 오가며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근데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도 많았고, 분명 외국인처럼 생겼었는데 한국인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길래 뭔가 속은 기분이었다. 물론 나이는 나보다 어렸지만 난 진짜 외국인하고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한국인이라는 것이 왜 그리 아쉬웠을까...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사람이 참 착한 느낌이었고,
어느새 우리는 영어공부를 위해 컨택했던 것을 잊은 채 한국어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렇게 목적을 잃어갈 때쯤 그가 말했다.
"누나가 영어로 일기를 하나씩 써서 보내면 내가 그걸 수정해 줄 테니까 한번 같이 해볼래?"
맞다... 나 영어공부하려고 미국인 친구 구했던 건데...
"고마워! 그럼 써서 보내볼게."
뭔가 목적을 잃을뻔했던 관계를 바로잡는 모습까지 참 바른 청년 같은 느낌이었고, 우리는 어떤 이슈를 같이 해결하려고 노력하다가 사이가 가까워지게 되면서 어느새 연인이 되어 있었다.
나에게 영어공부를 같이 하자고 했던 동생이 이번엔 같이 미국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남자친구가 된 그를 실제로도 보고 싶었고, 혼자 가기엔 무서우니 친한 동생과 같이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당장에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겁이 많아 국내여행도 부모님 없이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내가 그 동생과 같이 미국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언니... 너무 미안해...
내가 일이 생겨서 미국을 못 갈 것 같아...
중국에 갈 일이 생겼어... 진짜 너무 미안해..."
"아... 할 수 없지 뭐... 괜찮아... 중요한 일인데 잘 처리하고 와."
비밀이란 없었던 우리 사이에서 함께 미국여행 가기로 했던 동생에게는 당시 정말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고, 미국을 가기로 했던 그 시기에 중국에 갈 일이 생겨버렸었다. 이미 나는 남자친구에게 친한 동생이랑 미국여행을 갈 거니까 가이드해 달라고 부탁하고, 여행코스도 짜달라고 해놓은 상태라 남자친구는 들뜬 나머지 너무 기대하고 있던 때였는데, 못 가게 됐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도 정말 알 수 없는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둘이 다니면서 실제 데이트도 할 수 있고,
오히려 여행이 재밌을 수도 있잖아. 그래! 나 혼자 가자, 미국에!'
지금 돌아보면 평소 나다운 생각도 아니었는데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는 남자를 보러, 그것도 미국까지 비행기를 10시간이 넘도록 타고 혼자 간다는 것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일을 나는 실제로 했고, 우리는 그렇게 수줍게 LAX 공항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나의 미국여행 일정은 딱 11일이었기에 우리가 만난 실제 데이트 역시 11일이 전부였다.
우리의 연애기간은 총 6개월이었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던 게 아니었기에 실제로 얼굴을 보고 만난 기간은 고작 11일이 전부였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가진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남자친구는 전화로 프러포즈를 했다.
“너 없이는 이제 안 될 것 같아... 우리 결혼하자!”
우리는 그렇게 11일의 만남이 전부 인 채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우리가 결혼을 하기로 했다고 지인들에게 밝힌 후, 우리가 친한 지인들에게 들은 말은 축하가 아니라 걱정스러운 말들뿐이었다.
지금의 남편은 친구들에게 비자 때문에 너랑 결혼하려는 게 아니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나는 결혼이 장난이 아닌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갔다가 영화 테이큰처럼 팔려가면 어쩌냐느니, 금방 맞지 않아서 이혼할 수도 있다는 그런 걱정들의 말만 잔뜩 들었다. 축복의 말보다는 염려의 말만 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지만 기도를 할수록 나에겐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내 짝이라는 생각이 확고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조심성 많은 나답지 않은 행동과 결단으로 남편 하나만 보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모두의 걱정과 달리 우리는 어느덧 결혼 10주년을 맞이했고, 부부가 된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우리 부부에게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미국에 와서 9년이 넘도록 제대로 영어도 못하던 나는 내 아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싶어서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P.S. 브런치 작가가 사실 어떤 것인지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귀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읽어주시는 분들께 첫 글에는 감사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꼭 한번 이야기하고 싶었던 저의 미국 이민 이야기를 브런치를 통해 조금씩 풀어볼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왕이면 읽는 분들에게 재미와 더불어 조금이나마 마음에 따스함도 전해질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네요. 부족함이 많은 저의 첫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