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이민 1.5세다. 한글은 진작에 다 뗀 시기였고, 한국말도 잘할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지만 한국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이 더 길었던 남편은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 사람이었고,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모든 생활 습관까지 그냥 뼛속까지 미국인이었다.
분명 나와 남편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자주 소통의 오해와 오류로 인해 다툼이 생겼다.
어느 날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모든 게 우울하던 나를 위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기분 좋게 보고 돌아오던 차 안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그러면 정 떨어진다'라는 말을 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고, 또 나는 왜 그 말을 했었는지의 디테일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일이 머릿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때 나는 남편과 내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우리가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다지 큰 의미도 없이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정 떨어진다'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인데,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남편은 부부가 정이 떨어지면 어떻게 같이 사냐며 굉장히 화를 냈었고 상처가 됐다고 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아주 많이, 그리고 굉장히 자주 좀처럼 잘 좁혀지지 않는 문화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로 서로 많이 힘들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든 부부들이 그렇듯 우리도 이렇게 평생 관계가 좁혀지지 않으면 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헤어지자는 말도 입 밖으로 여러 번 했었다.
유독 내 대학동기들은 미국 각지에서 많이들 살고 있다. 그중 가까운 곳에 살며 가끔 만나던 친구가 한국말을 잘하는 미국인 남편 덕분에 너는 미국생활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쉽게 시작한다고 했다. 또한 결혼 이민이기에 신분의 문제도 없으니 넌 맘이 참 편하겠다며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한국에선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니면서 월급도 받고, 그 돈으로 부모님 맛있는 것도 사드리면서 뭔가 스스로를 쓸모 있는 사람이라 느끼고 보람되게 살아왔는데 미국으로 오니 나는 그냥 숨만 쉬는 송장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영화를 좋아해서 남편과 자주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지만, 남들은 다 재밌다고 웃는데 나만 혼자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고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한두 번은 괜찮았다. 영어니까...
난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여전히 극장에서 웃지 못하는 것은 나뿐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남편의 베프와 함께 영화를 봤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나는 분명 한국에 있을 때는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우리 부모님도 챙겨드리면서 나 스스로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었는데 미국에 온 후로는 극장에서 조차도 남들 다 웃을 때 나만 혼자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편은 그런 나의 상실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이후로는 극장에서 재밌는 장면이 나오면 귓속말로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해 주면서 나도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게 해 주었고, 영화를 다 보고 나올 때는 늘 줄거리를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베프들을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자기 친구들과의 자리도 자주 만들어 함께 수다를 떨 수 있게 해 주었고, 좋은 친구를 미국에서도 만들게 해 주려고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남편은 날 위해 신경을 써주고 있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가장 힘든 점을 '외로움'이라고 꼽는데, 나의 이민생활에서 외로움으로 힘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백인처럼 하얀 피부가 시꺼멓게 탈 정도로 좋아하던 농구도 나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남편은 그 시간을 포기했고, 시댁식구들과 불협화음이 생길 때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남편은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었다.
목소리는 나오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분명 소리는 들리지만 말 한마디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남편이 없이는 마트에서 물건조차 사지 못했다. 지금은 셀프체크인을 할 수 있는 기계가 많이 있지만, 내가 처음 미국에 이민을 왔을 때는 반드시 캐쉬어를 통해서 계산을 해야 했는데 미국인들의 스몰토크라는 문화 때문에 나는 남편이 없이는 정말 물건 하나도 살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How are you? (안녕하세요?)라고 한마디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내가 처음 미국에 왔던 시기에는 미국의 스타벅스도 골드 카드 멤버십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난 미국에 온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한국에서처럼 스타벅스 골드 멤버가 될 만큼 커피를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사 마셨다. 늘 남편이 알아서 주문을 해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연습할 겸 나보고 주문을 하라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남편의 생각은 확고했고, 나도 사실 평생 벙어리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 알았다고 했다.
"Can I get a Venti Iced Vanilla Latte, please? (벤티 사이즈 아이스 바닐라 라테 한잔 주시겠어요?)
이거만 외워서 딱 이거만 말하면 돼. 알았지? 내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편이 옆에 있을 거니까 일단 용기를 내서 커피를 주문했다. 다행히 직원은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근데 나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 한 단어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는 남편을 쳐다봤고, 남편은 혹시나 내가 알아듣지는 않을지 3초 정도의 여유를 두고 있다가 내가 민망해지려고 할쯤 대신해서 대답을 해주었다.
"뭐라 그런 거야?"
"응, 영수증 필요하냐고 물어본 거야. Would you like the receipt?이라고 말한 거니까 다음번엔 기억해 봐."
그렇게 남편은 계속해서 커피주문을 나에게 시켰다. 정말 너무 짜증이 나서 그냥 좀 해주면 안 되냐고 싸우기도 했지만 남편은 정말 엄청나게 확고했다. 그렇게 1년을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주문했는데, 남편은 가끔 메뉴도 바꿔가며 주문하는 걸 보여주었고, 그 다음번엔 어김없이 내가 주문하게 했다. 그리고 얼음을 적게 주문하는 법부터 커피 안에 들어가는 설탕 종류를 바꾸는 법까지 다양하게 주문하는 말을 알려주며 내가 직접 해보게 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의 말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영어를 못하고 버벅대고 당황하는 상황이 왔을 때, 그런 나에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사람들도 간혹 있었는데, 그럴 때면 늘 한걸음 뒤에서 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은 갑자기 다가와서 내 와이프인데 당신 지금 영어 못한다고 그딴 식으로 함부로 하면 되는 거냐며, 고객 서비스가 이 정도밖에 안 되냐부터 시작해서 여기는 관광객도 많이 오는 곳인데 당신은 직원교육을 제대로 받은 게 맞냐고 매니저 누구냐 하면서 엄청나게 버럭 했었다.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느낄 수 있듯이 나도 그때 그랬다.
이 남자 참 멋있다고...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벙어리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를 연습시키고 있었구나... 하고.
내가 임신했던 기간이었는데, 보험변경을 해야 해서 보험회사와 전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남편은 출근을 해야 해서 출근준비를 하고 있었고, 본인이 아니면 안 되는 미국 시스템으로 영어도 안 되는 나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편이 통역관 부르면 된다고 나가기 전까지 내가 같이 들을 테니까 긴장하지 말고 스피커폰으로 해서 받으라고 했다.
전화 너머에서 어떤 남자가 자기는 누구라고 간략히 소개를 하고 무슨 일로 전화했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 이름은 누구이고 보험을 바꿔야 해서 전화했다고 남편이 알려준 대로 말을 했지만 듣기만 해도 영어 못하는 외국인이라는 게 너무 티 나고 짜증이 났는지 그의 말투가 틱틱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기 시작했는데, 출근준비를 하던 남편이 갑자기 오더니 나는 남편인데 내가 영어를 할 수 있지만 너희들 시스템이 본인이 직접 전화해야 하는 거라서 내 와이프가 직접 통화를 하는 중이다. 내가 듣고 있었는데 내 와이프가 영어를 못한다고 당신 지금 무시한 거냐, 그렇게 무례한 말투로 말하지 말고 내 와이프에게 예의를 지켜달라고 굉장히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한국어 통역 서비스를 신청해 주었다. 남편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상담원은 내게 호칭부터 바꾸어서 정말 아주 정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통역관을 연결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Please라는 단어와 함께 정말 공손히도 말했다. (미국영어는 문장 맨 앞이나 끝에 Please라는 단어를 붙이면 정중한 존댓말이 된다.)
그렇게 분위기가 확 달라진 상황을 체크하고, 상담원 연결을 기다리는 중에 남편은 나가면서도 나에게 곧 통역사가 연결될 거고 상담원이 옆에서 내가 듣고 있을 줄 알고 이제 함부로 못할 거니까 편하게 통화하라며 이따가 보자고 말하고는 출근했다.
그날 그 시간이 내겐 지금도 너무 고마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전화를 하면서 남편이 좀 옆에 같이 앉아서 들어주고 도와주면 좋겠는데 전화가 연결이 되기도 전에 출근한다고 나가버릴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스트레스도 굉장히 심한 상태였다.
그랬는데 남편의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180도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또 한 번 남편이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토록 모질게 나를 몰아붙여 영어를 직접 하라고 화낸 것도 다 이유가 있었구나... 본인이 없는 곳에서 아내가 영어 못한다고 무시당할까봐 그게 싫어서 그토록 나를 연습시켰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남편은 모든 것에 다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수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