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te Sep 19. 2024

한국말을 못 하는 한국아이

엄마가 너의 언어를 배울게!

결혼 4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친정부모님 그늘아래 편하게 살다가 결혼이란 것을 하고서 부모님 곁을 떠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생각보다 많이 어려웠는데, 나라가 바뀌어 문화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나는 시부모님과 같이 한집에서 살아야 했다. 나는 우리 가족과는 다른 생활패턴을 가진 시댁의 생활패턴을 배워야 했고, 노력한다고 했지만 사실 너무나 다른 생활을 하는 가정으로 시집을 왔었기에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던 것 같다. 아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결혼 4년 만에 한국에 있는 친정에 와서 자궁에 용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용종은 잘못하면 암이 될 수 있다기에 바로 제거수술을 받았고, 미국살이 4년 동안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내 몸을 위해 친정부모님께서는 흑염소 한 마리를 다 넣어 한약을 지어주셨다.



직접 흑염소를 잡는 곳에 가셔서 갓 잡은 큰 거 한 마리를 직접 고르셨다는 엄마는 직접 고른 흑염소와 내 몸에 맞는 약재들을 같이 넣어 한약을 만들어주는 곳을 찾아가서 흑염소를 전부 넣었는지까지 직접 확인을 하시고 지어주신 약이었다. 자식 먹이신다고 본인도 안 드셔 본 약을 정성껏 지어주셨기에 한국에 머물던 3달 동안 나도 정성껏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그 약을 다 먹은 직후, 미국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한국에서 임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전에 몇 번 기대했다가 실망했던 적이 두어 차례 있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정확하게 임신이란 글이 보였다. 임신이란 것을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알게 됐는데, 남편은 임신한 나를 위해 바로 분가 준비를 시작했다.






친정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의 입덧 시기는 정말 힘들었다.



나는 먹덧이라는 것을 했는데, 보통은 많이 먹으면 그게 먹덧이라고 하지만 먹덧도 엄연한 입덧이기에 그냥 많이 먹는 것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입덧은 먹은 것을 토하거나 음식냄새 때문에 잘 먹지 못하지만 먹덧은 반대로 속이 비면 토할 것 같이 올라오고 너무 견디기 힘들어서 뭐라도 한입 베어 물어야 메슥거림이 진정되곤 했었다. 나는 친정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 입덧이 시작되니 그냥 그 모든 상황을 오롯이 혼자 다 견뎌내야만 했다. 자다가도 토할 것 같으면 사과라도 한 입 베어 물어야 했고, 그렇게 메슥거림이 심해서 사과를 한입 베어문채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자기도 했었다.


먹덧이 조금 진정이 되는가 싶더니 이젠 밥 짓는 냄새만 맡아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고 너무 힘이 들었다. 남편은 자기는 괜찮으니 힘들게 밥 하지 말라고 했지만 아침부터 나가서 일하고 돌아온 남편을 빈 밥통으로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꾸역꾸역 매일 밥을 했는데 혼자 덩그러니 소파에 앉아서 밥 냄새의 역함을 견디다 보면 부모님이 멀리 계시다는 생각에 한없이 서러움과 우울함이 밀려오곤 했었다. 아마도 그때가 내가 미국에 살았던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외로움으로 힘들었던 시간인 것 같다.




나이가 많은 산모였던 나는 출산일이 가까워지자 병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출산병원을 변경해 주었다. 임신기간 동안 아무런 이슈가 없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했었다. 그런데 출산예정일을 며칠 앞두고서 갑작스러운 출혈이 시작되어 검사만 받으러 갔다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는 응급실로 입원을 하게 됐었다. 그렇게 입원 후, 유도분만을 하던 중 양수가 터지면서 아이의 심정지가 오락가락한다며 갑자기 영화에서나 보던 장면처럼 여러 명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뛰어오더니 내 가슴 위로 내가 맞고 있던 링거와 무통 링거 등을 던지듯 올려놓고는 대여섯 명이 내 침대를 잡고 수술실로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유도분만을 시도하던 중 진통 10시간 만에 나는 그렇게 응급수술로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들은 전부 이중언어 다 하는 거 아니야?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아이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기본적으로 다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아이들이 영어만 하고 한국어는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를 못하는 2세 아이들을 보며 부모탓을 했다.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은 부모 잘못이라고.



나도 내 아이가 당연히 이중언어를 쉽게 할 거라 생각했다. 그나마 한국어를 좀 잘하는 집 아이들의 부모님들의 조언을 따라서 집에서는 남편과 한국어만 사용했었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영어뿐 아니라 스페니쉬에 중국어 등등 이민자가 많은 캘리포니아에서는 정말 다양한 언어들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영어를 처음 듣던 내 아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아기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이웃을 만나 가볍게 영어로 인사하며 아이가 너무 귀엽다, 몇 개월 되었냐 와 같은 흔한 대화를 아주 잠깐 나누었을 뿐인데 집에서 한국말만 듣던 아이가 저건 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것 같은 정말 놀란듯한 표정을 짓고 한참을 그 이웃 아저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머릿속은 아이의 표정을 보는 순간 아이가 말이 늦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 3살이 넘어도 말을 못 하던 아이는 한국에서 말이 트였다.



친정엄마의 큰 수술로 인해 병간호를 하기 위해서 급하게 갔던 한국에서 3개월 동안 장기체류를 하게 되었다. 모든 언어가 한국어로 통일이 되니 한국에서 머물던 2개월이 지날 무렵 드디어 아이는 말이 트이기 시작했다. 코로나가 한국에서 가장 심하던 때였지만 아이가 하루종일 옆에 있으면 엄마 간호를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부득이하게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너무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코로나라는 이유로 학생들이 적은 것도 내 아이에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이가 말이 트이고 처음으로 내게 했던 말이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다녀온 날, 평소엔 점심시간에 늘 데리러 오던 엄마가 점심시간이 지나고 낮잠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질 않자 아이는 창밖을 바라보며 울먹였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셨다. 나라가 바뀌고 아빠도 없는 낯선 땅에서 아이는 엄마도 자기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니 아이는 더듬더듬 첫 말을 떼었다.


친정 엄마의 좋지 못한 건강상태도 내겐 너무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었는데, 이제 갓 40개월이 된 내 아들이 말이 트이면서 내게 건넨 첫마디가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아이의 고백을 듣고 나는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내게 미국이란 땅이 낯설었듯이, 너에겐 한국이 낯선 곳이었겠구나... 엄마가 미안해...'




다행히 친정엄마의 몸이 많이 회복이 되시고, 직접 식사도 차려드실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신 것을 보고서 미국으로 3개월 만에 돌아왔다.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는 이제 아빠를 보러 집으로 가는 거냐며 여러 번 물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하자 아이는 신나 했었다.





또다시 시작된 언어의 어려움...


아이는 4살이 되었고, 이제는 킨더가든 입학을 앞두고서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래서 프리스쿨에 입학을 시켰는데 아이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남편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집에서 아이에게 영어만 쓰기 시작했고, 나는 계속해서 한국말로 아이와 대화를 했다.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아이는 집에서 만화를 보며 대사를 달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본걸 또 보고, 또 보고 수도 없이 보면서 아이는 대사를 외웠고 억양과 말투까지 따라 하며 혼자 쉐도잉까지 하고 있었다. 아이는 반 친구들과 놀겠다는 목표 하나로 조금씩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기 시작했고, 모르는 말은 영어로 어떻게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며 배워갔다. 그렇게 또 세 달이 지났고 아이는 영어를 더 편하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임신이 되었던 한국인 2세인 내 아들은 이제 더 이상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곳에 다 적지 못한 언어로 인해 내 아이가 겪은 어려움들을 모두 지켜본 엄마로서 나는 내 아이에게 한국어를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어린 나이에는 여러 가지 언어를 다 금방 배우고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어린아이들도 언어적 재능이 있는 아이들이 아니라면 어른과 마찬가지로 언어습득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내 아이를 보며 깨달았다.


내 아이는 프리스쿨을 다니던 시절부터 지금 킨더에 다니면서도 선생님들이 굉장히 똑똑하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프리스쿨을 다니던 때는 학교 전체 학생을 통틀어 우리 아이가 가장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었고, 킨더가든에 입학하기 전에 Reading & Writing 수업과 수학 수업을 가르쳐주시던 문화센터 선생님은 아이가 킨더 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월반을 알아보거나 영재반이 있는 좋은 학교를 잘 선택해서 입학할 것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즉 아이가 멍청하고 머리가 나빠서 이중언어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내 아이는 언어 쪽에 특출 난 달란트가 없을 뿐이었다.







자식들한테 한국어 안 가르치면 평생 후회해!

아이가 크면 말도 안 통할텐데 한국어 안 가르치는 부모들 보면 한심해!


많은 이민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내 아이의 어려움을 보았고, 내 아이처럼 다중언어 노출로 인해서 오랜 시간 말조차 트이지 않아 맘고생 하는 엄마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니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들이 미웠다! 그리고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수십 년을 미국에 살았어도 영어한마디 할 줄 모르는 이민자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기에 영어를 하지만 한국어를 잘 못하는 아이들과 수십 년을 미국에서 살았고 앞으로도 미국에서 살 거지만 영어한마디 못해서 자식들한테 통역해 달라고 늘 부탁하는 당신들 중 과연 누가 더 한심하냐고...! 당신은 수십 년을 살았어도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강요하냐고!



한국에서는 요즘 너무 어린 나이에 영어노출로 인해 아이들이 모국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동시에 뇌가 망가진다는 연구결과까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나는 내 아이가 영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편해지고 나서 10살 전후쯤에 아이가 관심을 보인다면 그때부터 한국어를 가르쳐볼 생각이다. 그리고 내 아이가 한국말을 잘 못하는 지금, 나는 내 아들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영어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지만 내 아이를 훈육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영어공부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음을 영어공부를 할수록 많이 느끼는 중이다.



나는 내 아이에게 엄마가 영어를 못하니 네가 한국어를 해야 한다고 5살에게 강요하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먼저 너의 언어를 배우고 너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할게라고 말해주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내 아들과 대화하고 싶고, 내 아들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 하는 고민들을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싶어서 영어를 공부한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인과 결혼했지만 남편은 미국인이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