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과 ‘상반’, 그리고 루마니아어
저희 가족들은 종종 저나 제 동생이 어렸을 때 쓰던 말들을 그대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상반(없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저희가 어렸을 때 '상관(없다)'를 (잘못 듣고?) 잘못 발음했던 것을 부모님이 반쯤 놀리며 흉내를 내시다가 굳어져 정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상관'을 '상반'으로 잘못 발음한 것을 자세히 보면, 다른 건 그대로인데 '과'의 '고(ɡʷ)' 부분이 'ㅂ(b)'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어린 저희의 귀에 'ɡʷ'라는 발음이 'b'와 비슷하게 들렸던 것이겠죠.
흥미롭게도, 저나 제 동생처럼 'ɡʷ'를 'b'로 잘못 듣는 사람이 인류 역사에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 루마니아어(Romanian)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루마니아어는 그 유명한 라틴어(Latin)의 후손 언어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라틴어의 단어를 많이 물려받아 간직하고 있습니다.
라틴어에는 '혀, 언어'를 뜻하던 '링과(lingua)'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ɡʷ' 발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 언어인 루마니아어에서 '혀, 언어'를 뜻하는 단어는 '림버(limbă)'입니다. 'ɡʷ' 발음이 'b'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몇 세대에 걸쳐 언어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마치 저희가 '상관'을 '상반'으로 듣던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가 그게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굳어져 정착한 것이겠죠.
이렇듯 아이가 언어 습득 과정에서 범하는 오류는 거시적인 공동체 단위의 언어변화와 비슷한 점 또는 그것을 유발할 잠재적인 특징들을 반영할 때가 있는 듯합니다.
- 아이가 범하는 산발적인 오류가 결국 관습화되어 언어변화로 정착하는지 아니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지의 여부는 문맹률과 연관이 있을 듯합니다. 저나 제 동생은 '상반'으로 말하다가도 어느 시점에 글을 익혀 문자언어를 통해 보수적인 표준어를 접했기 때문에 '상관'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맹자가 대부분이었을 옛날 사회, 예를 들어 루마니아 사회에서는 원래의 어형이 'lingua'라는 걸 접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limbă'라는 어형이 정착하는 데에 더 좋은 환경이었겠지요.
- 이 글에서는 'gʷ > b'만 소개했지만 루마니아어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은 'kʷ > p' 변화입니다. 음성학을 아신다면 금방 눈치채셨겠지만, 'gʷ > b'에서 유성음을 무성음으로 바꾸기만 하면 'kʷ > p'가 되므로 둘은 아주 유사한 현상입니다.
라틴어 aqua('물') > 루마니아어 apă ('물')
라틴어 quattuor('4') > 루마니아어 patru ('4')
- 고전 그리스어의 'ἵππος (híppos, 말馬)' 또한 'kʷ > p'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 말입니다. ( < 원시 그리스어 *íkkʷos )
- 광동어(Cantonese)의 'kʰʷ > f' 변화도 비슷합니다. 快 faai3
+ 재미있게도, 톨킨이 만들어낸 엘프어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였던 톨킨이 이상의 언어변화 사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가상 언어에도 반영한 것이겠죠.
kwendi > pendi (Teleri)
- 그러면 애초에 gʷ나 kʷ를 왜 b나 p로 잘못 듣거나 잘못 말할까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음향음성학적으로 연구개음(k, g)이 순음(b, p)와 어떤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성질인지는 제가 정확히 잘 모르지만, 연구개음과 순음에 음운론에서는 grave라는 공통 자질을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 조음음성학적으로, 순음화된 연구개폐쇄음을 발음하는 것보다 그냥 양순폐쇄음을 발음하는 것이 (기능은 비슷하면서) 조음시의 에너지는 덜 들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