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절과 SVO 어순
중국의 역사 드라마 <연희공략>을 얼마 전에 정주행했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문득, 중국어의 문법에 대해 새삼 특이한 점이 느껴졌다.
"可是她是一个连自己都保护不了的可怜人。"
[그러나] [그는] [이다] [한 명의]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그러나 그는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어."
위 문장을 보면, 관계관형절 '자기자신도 보호하지 못하는'은 그것이 수식하는 명사 '(불쌍한) 사람'의 앞에 위치한다.
중국어가 동사를 목적어 앞에 두는(VO) 언어임을 고려하면 이것은 아주 특이한 일이다.
왜냐면 VO언어의 약 99%*가 관계절을 명사 뒤에 두기 때문이다. (영어의 어순을 생각하면 된다.)
*온라인 언어유형론 데이터베이스 WALS(World Atlas of Language Structure Online) 기준
(위 예문이 전형적인 타동사 구문은 아니지만, 계사 뒤에 보어가 등장하는데 그 보어의 어순 구성이 [관계절-명사]라는 점에서 V-O[Rel-N] 어순을 언뜻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에서 [수사+양사 뒤에 나오는 관계관형절]이나 [개사(전치사)의 목적어를 수식하는 관계관형절]이 등장하면 왠지 특별히 더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어 보자.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다'라는 말을 세계의 여러 언어로 표현한다면 각각 어순이 어떻게 될까?
관계절과 명사의 어순(관계절-명사 vs 명사-관계절)은 '오르지 못할 - 나무 vs 나무 - 오르지 못할' 둘 중 하나가 될 것이고,
동사와 목적어의 어순(목적어-동사 vs 동사-목적어)은 '나무를 - 쳐다보다 vs 쳐다보다 - 나무를'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상의 경우들을 교차분류하면 아래와 같은 2*2 표를 만들 수 있다.
(여기 제시하는 언어 개수 자료는 모두 WALS를 기준으로 한다.)
- 한국어와 같이 '오르지 못할 - 나무를 - 쳐다보다'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전세계에 약 132개 있다고 한다. (OV & Rel-N)
- '나무를 - 오르지 못할 - 쳐다보다'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로는 예를 들어 이란어(페르시아어)가 있고, 이러한 언어는 약 113개 있다. (OV & N-Rel)
--> 목적어-동사(OV) 어순의 경우에는 관계절이 명사 앞에 나오는 언어도 많고 관계절이 명사 뒤에 나오는 언어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사-목적어(VO) 어순인 언어들을 보면 매우 편향된 결과가 나타난다.
- 영어처럼 '쳐다보다(look up) - 나무를(a tree) - 오르지 못할(you can't climb)'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무려 416개가 보고된 반면에, (VO & N-Rel)
- 중국어처럼 '쳐다보다 - 오르지 못할 - 나무를' 순서로 표현하는 언어는 전세계에 겨우 5개밖에 없기 때문이다. (VO & Rel-N)
그 목록을 자세히 살펴 보면 놀라움이 더한다. 전세계에서 딱 5개 보고된 [VO & Rel-N] 언어 중 무려 3개가 중국어의 '방언', 또는 중국어파 언어(Sinitic languages)이기 때문이다. (표준 중국어, 광동어, 객가어. 다른 '방언'들도 살펴보면 [VO & Rel-N]의 사례가 더 많이 나올 듯도 싶다.)
심지어 나머지 두 개 언어가 [VO & Rel-N]의 어순을 갖게 된 것 또한 중국어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
WALS의 해당 챕터를 집필한 Dryer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VO & Rel-N 유형의 언어들] are distinctly rare. Apart from Mandarin and other varieties of Chinese, the only other cases on the map are two languages in close geographical proximity to Chinese, namely Bai, a Tibeto-Burman language of China that has been heavily influenced by Chinese, and Amis, an Austronesian language of Taiwan (Joy Wu, personal communication), where there is also a possibility of influence from Chinese."
한마디로, 중국어(의 방언들)와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언어들을 제외하고서는 전세계에서 동사-목적어(VO) 어순을 지니면서 관계절을 명사 앞에 위치시키는(Rel-N) 언어가 아직까지 보고된 바 없다. (적어도 WALS에는 올라 있지 않다.)
중국어의 관계절 어순은 실로 이만큼 특이한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언어유형론 교재 및 아래 WALS 링크를 참고하시길:
https://blog.naver.com/ktb2024/223535977110
위에 받아쓴 <연희공략> 대사 중에 '严禁任何人此事以论'이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엄금’은 정말 엄격 근엄 진지하게 금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yánjìn’ 하니까 구개음화 때문인지 좀 귀엽달까 어감이 훨씬 약한 느낌이 든다.
음성상징? 혹시 고모음일수록, 전설모음일수록 작은 것에 연결되곤 하나? 종성(운미)도 두 음절 다 m이 아니라 n이 나오니까 원래보다 약한 느낌.
구개음화도 그렇고 명나라 사람 부산이 느꼈을 감정이 이런 걸까 ㅋㅋ
실제로 베트남어의 'nghiêm cấm'은 나한테는 '엄금'처럼 엄근진한 어감이 든다.
+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한 이유'라는 제목은 약간 misleading한데,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하게 발달한 역사적/기능적 이유를 말하는 게 아니고, ‘중국어의 어순이 특이한 것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이유’라는 뜻이다. 전자와 같은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가치있는 목표가 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 본문에 2*2의 속 편한 표를 제시하긴 했지만, '어느 언어의 어순은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떤 문장의 어순은 형태론적 격 표지의 유무, 정보구조적인 요인 등에 의해서 매우 다양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실제로 위 표에 제시한 한국어, 중국어, 이란어는 영어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순이 훨씬 자유로운 언어들이고, 또 영어 문장이라고 해서 항상 목적어가 동사 뒤에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언어유형론 연구자들이 여러 언어의 어순을 비교할 때는 여러 기준에 의해서 각 언어의 '기본 어순'을 도출해 내는데, 늘 다양한 논란이 뒤따르는 것 같다.
+ 관계화 전략(relativization strategy)이 언어마다 다르다는 점 또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영어의 어순을 '쳐다보다 - 나무를 - 오르지 못할'과 같이 표현했지만 이런 표기에서는 영어의 관계화 전략이 '관계대명사'라는 점이 드러나지 못한다.
+ 괜히 좀 있어 보이는 예문을 쓰고 싶어서 유명 어록, 속담 이런 걸 쭉 훑어 보면서 한참을 고심했는데 마땅한 게 잘 없었다. 목적어에 관계절이 포함되는 문장이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주어의 관계화와 사격어의 관계화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좀 더 고민했던 점도 있었는데 여기서 제대로 고려하기는 어려운 문제 같아서 일단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이란어를 잘 모르니 WALS에 OV & Rel-N 유형으로 실려 있다 해도 이 글에 가져다 쓰기가 좀 불안했는데, 위키백과에 첨부된 링크를 통해 Mace, John (2003). Persian Grammar: For Reference and Revision. Routledge Curzon. 라는 자료에 접근해서 아래와 같은 사례를 확인했다.
کتاب هایی] [را] [ [که] [خریده ام] ] [گم کرده ام]
[ketābhāi 책들] [rā 을] [ [ke 관계대명사] [xaridam - 내가 샀다] ] [gom kardam - 내가 잃어버렸다]
요약
중국어의 어순은 동사-목적어(VO)이면서 관계절-명사(Rel-N)이다.
WALS에서 관계절-명사의 어순과 동사-목적어의 어순을 교차분류(cross-classify)해 보면 중국어의 관형절이 얼마나 특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전세계 언어들 중 중국어처럼 목적어가 동사 뒤에 나오는(VO) 언어는 거의 99%가 중국어와 달리 관계절을 피수식 명사 뒤에 등장(N-Rel)시킨다.
WALS 데이터베이스에 올라 있는 수많은 언어 중에 목적어가 동사 뒤에 나오면서(VO) 관계절이 피수식 명사 앞에 나오는(Rel-N) 언어는 딱 다섯 개밖에 없다. 그 중 세 개가 중국어의 ‘방언’이며(Sinitic languages), 지역적으로 말하자면 다섯 개 언어가 전부 비슷한 지역에서 쓰인다. (WALS에서는 Sinitic이 아닌 나머지 두 개 언어도 중국어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 SVO로 제한하면 Amis어가 제외되기 때문에 4개로 줄어든다.
한 마디로,
동사-목적어(VO) 어순을 취하면서 관계절을 명사 앞에 두는(Rel-N) 언어는 중국어가 거의 유일하다.
(Bai어와 Amis어는 중국어와 전혀 다른 별개의 언어지만 만약 [V와 O의 어순]과 [Rel과 N의 어순] 사이의 상관관계 연구를 위해 표본을 구축하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 표본에 중국어를 넣었다면 보통 Bai나 Amis는 제외하는 편이 합리적일 것이다. 계통적 편향뿐만 아니라 지역적 편향 또한 표본에서 제거하는 편이 좋기 때문이다.)
+ V O[Rel-N] 어순이 유형론적으로 특이하니, 혹시 목적어가 관계절의 수식을 받을 때는 把자 구문의 사용 빈도가 더 높아질까?
“把 O[Rel-N] V” 이런 어순은 (전치사 vs 후치사만 빼면) 한국어 유형과 같으므로 유형론적 특이함을 유발하는 모종의 부담이 덜할 것 같다.
코퍼스에서 관계절 수식을 받는 목적어들을 쭉 모아다가 把자 구문의 출현 빈도가 절반 이상인지 보거나,
관계절 수식을 받지 않는 목적어에서의 把자문 출현 빈도를 관계절 수식 받는 목적어에서의 把자문 출현 빈도와 비교하거나
해 보면 어떨지 궁금하다.
把刚才对本宫说的话,向皇上禀报一遍吧。
방금 본궁에게 한 말을 폐하께 말씀드려라.
를 듣고 떠오른 생각.
‘품의’할 때 禀 자가 bing3으로 저 대사에 등장하는데 이 또한 expected Mandarin reflex (bin)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