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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Oct 28. 2023

비등점

참을 忍 두 번의 의미


물질을 마찰시키거나 가열할 때 불이 붙기 시작하는 최저 온도가 발화점이다. 비등점은 액체가 열을 받아서 끓기 시작하는 온도를 가리킨다. 물은 일반적인 조건 하에서 100도에 도달하면 어김없이 끓기 시작한다.


이에 반해, 사람의 비등점(발화점), 즉 화가 폭발하는 시점의 온도는 자연의 섭리와는 달리 절대 기준이 없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자의 고유 온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외부의 조건과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비등점은 천차만별이다.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비등점이다. 인간관계의 갈등과 대립은 주로 비등점의 차이와 이해부족으로 인해 발생한다. 지피지기에 성공하려면 나와 상대의 비등점부터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비등점을 기준으로 타인의 온도를 판단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불협화음이 끊이질 않는다.


비등점이 110도인 사람은 그 이하의 온도에서 화가 끓는 사람에 대해 너무 쉽게 화를 낸다고 비난한다. 직장에서 자기보다 훨씬 낮은 비등점을 가진 상사와 같이 일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상사의 불같은 성격을 매일 상대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주변 비등점이 지나치게 낮은 사람이 있다면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 봐야 한다.


부부사이도 마찬가지다. 비등점이 같다면 그건 천생연분이다. 하지만, 현실은 단 1도 차이에도 다툼이 일어난다. 나는 아내의 비등점이 나 보다 낮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자신의 비등점이 나 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상대의 온도는커녕 자신의 온도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갈등을 피하는 방법은 상대의 끓는 물에 손을 담그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고, 상처뿐인 싸움에 지치다 보면, 자신의 온도가 몇 도인지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문제는 타인의 온도다. 죽 끓듯 하는 사람들의 온도는 여전히 높고 난해한 장벽이다. 어제는 분명 100도였는데, 오늘 갑자기 90도에서 펄펄 끓는 사람을 만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이 깊어지고, 결국에는 멀어지거나 아예 결별을 하게 된다.

화를 낼 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자위해 보지만, 한번 금이 간 관계는 원상 복구가 쉽지 않다.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화의 속성 때문이다. 화는 나의 관점에서 일어나지만, 그 화로 인해 내가 받을 과보는 세상이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오래전부터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는 암묵적 합의가 하나 있다. 바로 자신의 화난 상태를 주변에 미리 알리는 이다. 일종의 조기 경보(경고)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번까지 발동한다. 기분 나빠, 나 화났어라고 대놓고 표현하기도 하고, 표정과 행동으로 넌지시 알리기도 있다. 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비등점만큼이나 각양각색이다. 성격상 은밀하고 간접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하다 보면 충분히 그 신호가 의미하는 바를 알아차릴 수가 있다.  


비등점이 높은 사람은 대체로 상대의 경고를 빨리 캐치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다. 낙관적이고 너그러운 성격 탓에 촉수의 작동이 둔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의 사람들은 상대의 입장에서 신호를 감지할 수 있도록 센서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비등점이 낮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 성질대로 지나치게 자주 경고를 날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오는 경고에 내성이 생기거나 아예 무시해 버릴 것이다.    


두 차례의 경고 신호에인내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한 관용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용서를 구하는 입장이라면 두 번의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두 번째까지 기다리지 말고 첫 번째 신호가 왔을 때 바로 사과하고 자신을 언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 

'보자 보자 하니까'라말을 듣는다면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달리 표현하면 '참다 참다 도저히'가 된다. 두 번 까지는 눈감아 줬지만, 세 번째는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을 일으킨다. 용서받기 어렵다.


삼진아웃제도 마찬가지다. 두 번까지는 봐주지만, 세 번째 걸리면 가중 처벌이 내려진다. 엄마가 아이에게 보내는 경고의 숫자는 셋에서 멈춘다. '하나, 둘.. 셋!' 엄마의 입에서 셋이 나오기 전에 멈춰야 아이는 야단을 면할 수 있다.


화의 원인과 정도도 중요 하지만, 사람들은 횟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횟수가 잦아지면 내부에 응축된 압력이 증폭된다. 임계치를 벗어나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다. '세 번'이 얼마나 실행하기 힘든 숫자면 이런 말이 생겨났겠는가(사실, 한 번만 잘 참아도 살인을 면할 수 있다)


세 번까지, 아니 그 이상 참을 수만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화를 안으로만 삭이다가는 스트레스가 쌓여 화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 번으로 끝낼 수는 없다. 어쩐지 인정머리가 없어 보인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상황에서 감정 조절이 쉽지 않겠지만, 참을 인 두 번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미덕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보잘것없는 참을성으로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살인을 피해 으니, 이 보다 더한 다행히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지금 내가 이렇게 온전하게 살아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참을 인 덕분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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