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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원 Nov 18. 2023

'태백산맥' 오디오북 후기

누군가는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

  

"언제 떠올랐는지 모를 그믐달이 동녘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는 그믐달빛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마음대로 물리치지 못했다"

하소설 태백산맥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정적이면서도 적막한 밤풍경에는 앞으로 전개될 대서사시의 애한이 서려있다.



내가 태백산맥을 읽었던 때는 9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당시 태백산맥은 이념논쟁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태풍급 바람을 일으키며 서점 진열대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역사의 두꺼운 장막이 걷히자 주입식 반공교육에 길들여져 있던 독자들은 아픈 현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작가의 창작이냐 실제 사건이냐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태백산맥 역사 다큐멘터리가 되어갔다. 더 이상 재미로만 읽는 소설이 아니었던 것이다.


판금해제와 검열 완화로 현대사를 다룬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해방 후 소작농들의 기구한 삶을 심도 깊게 다룬 책은 태백산맥이 처음이었다. 좌우 대립의 혼돈 속에서 소작농들의 저항과 빨치산에 가담하는 과정을 역사의 흐름과 시대상황 따라가며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이었다.


해방이 되자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불렀던 소작농들의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좌절과 절망으로 바뀌었다. 농지개혁은 기약이 없었고, 친일과 불법으로 토지를 취득했던 지주들은 일정 때 보다 더 악랄한 방법으로 소작농들을 착취했다. 일본의 앞잡이로 악명을 떨쳤던 경찰들은 그대로 복직되어 정부의 묵인과 비호 아래 멋대로 공권력을 휘둘렀다. 소작농들에게 국가(정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노예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죽든가, 아니면 싸우다가 일찍 든가. 


완독 후에도 오랫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분단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념대립의 망령은 우리의 삶 전반을 끈질기게 지배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동안 태백산맥은 수 백만 부가 팔렸,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한때 이념 시비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태백산맥(개정판)이 올해 7월 오디오북으로 출시되었다.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태백산맥과 재회했고, 성우들의 목소리에 실려 환생한 여러 인물들이 옛 친구들처럼 반가웠다. 약 3개월 간의 역사기행은 출퇴근 운전의 피로와 따분함을 잊게 해 주었다. 


감칠맛 나는 성우들의 연기는 마치 가까운 거리에서 사건 현장지켜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 그곳에는 여전히 죽음보다 못한 농민들의 비참한 삶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농민해방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영혼들의 한(恨)이 이 계곡 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효수된 형(염상진)의 머리를 끌어내리라고 소리치던 염상구의 반전 외침이 오래도록 귓전을 맴돌았다. 그의 외침은 경찰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사상이 뭐길래 저렇게 많은 생명들이 허망하게 죽어간단 말인가! 빌어먹을 사상, 빌어먹을 세상을 향한 절규였던 것이다.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가 빨갱이 맹근당께요'(1권, 6번째 목차 제목). 염상진, 안창민과 같은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소작농들은 입산 후 처음 공산주의 이론을 접했다. 좌익사상에 물이 들어서 빨치산이 된 것이 아니라, 원통하고 절통하여 울부짖고 몸부림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버렸던 것이다. 빨갱이 표식이 주홍글씨처럼 이마에 박힌 상태에서 이들의 목숨은 이미 반쯤 끊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작농들이 마지막으로 잡은 지푸라기는 빨치산이었다.


문제는 빨치산이 된 소작농들의 염원과 사회주의 혁명 과업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었다는 것이다. 소작농들의 바람은 노예나 다름없는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이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열렬한 혁명전사였다. 지주와 경찰을 향한 저항은 혁명전쟁으로 바뀌었고, 한반도의 남쪽을 해방(공산화) 시키는 것이 이들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살아가는 세상, 인민해방의 나라! 소작농들은 과연 이 말을 얼마나 믿었을까? 안타깝게도 이러한 세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어떤 종교나 이념으로도 실현하지 못했던 유토피아였던 것이다. 설사, 그러한 이상적 세계가 존재하더라도 공산주의 체제에서만 실현 가능하다는 생각은 성급하고 편협된 판단이었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은 무덤에서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이 두 가지가 인간의 본성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한, 평등세상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에서 종교나 이념이 이러한 환상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 때, 이들의 구호에 대중이 과도하게 심취할 때는 어김없이 큰 불행이 뒤따랐다.

당시 대다수 빨치산들은 자신들이 미소 냉전의 대리전에 휘말려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민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명분은 있었지만, 현실은 체제수호와 정권유지를 위해 글로벌 양 진영이 참여한 죽고 죽이는 국제판 살육전이었다.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세상을 뒤집든가 아니면 산속에서 총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들 소작농들에게 한 뙈기의 땅이라고 있었다면, 아니 김사용, 안창민과 같은 인심 후한 지주에게 소작을 붙일 수만 있었어도, 부모와 처자식을 사지에 남겨둔 채 산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움이 피로처럼 몰려왔다. 수많은 소작농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주의 노예로 살다가 비참하게 죽고, 경찰에 고문당해 죽고, 감옥에서 병들어 죽고, 전쟁터에 끌려가 죽고, 빨치산 하다가 죽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죽음이 무의미하거나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던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 세상을 향해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공평하지 못한 세상은 모두에게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경고를 보냈다.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태백산맥을 읽으며 감동을 받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의 외침과 절규는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었다.



30년 전 태백산맥을 읽으며 분기탱천하던 내가 이 글을 읽는다면, 많이 변했다며 지금의 나를 비판할 것이다. 왜 변하지 않았겠는가! 그동안 강산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나의 몸과 마음도 시류를 쫓아가느라 쉼 없이 바뀌어 왔다. 더군다나 공산주의 국가들의 모순과 몰락을 목격했고, 인민해방이 이뤄지지 않은(당시 공산주의 이론 기준에서) 나라에서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 태백산맥을 다시 들으면서 새롭게 주목한 인물들이 있다. 김범우, 서민영, 전명환, 심재모, 이근술, 김사용, 법일 스님, 안창민의 어머니 신 씨.. 오래전 종이책으로 읽을 때는 김범우를 제외하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나는 이들의 행적을 쫓아가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우선시하는 인본주의에 마음이 움직였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이 아름다웠다.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과 다음 세대를 위해 씨앗을 뿌리고 나무를 심는 열정은 이념이나 총칼 보다 더 강해 보였다. 


하지만, 선각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권, 정의, 권리, 공정, 자유(언론, 집회, 결사, 사상, 양심), 역사의 진실' 등의 표현들이 힘을 가진 자들의 귀에 거슬리는 순간 언제든 적색분자로 몰릴 수 있는 것이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대중을 선도하고 계몽할 선각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은 서서히(때로는 세대를 이어가며) 퍼져나가 구성원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렇게 숙성된 대중의 힘은 위기 속에서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깨어있는 대중은 국가 폭력과 위정자들의 폭정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금도 남아있는 이념대립의 상흔이 더 크게 느껴졌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이념을 초월하는 인류의 공통된 염원이다.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이 다를 수는 있어도 과정이 인간답지 못하면 불행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 땅에 비극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어딘가에서 묵묵히 세상을 바꾸고 있을 선각자들과 우리 사회의 집단지성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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