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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익썬 Nov 25. 2022

차녀이야기 08.귀환

바람처럼 왔다 갔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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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차녀이야기도 어떻게 보면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리듯, 시인이 자화상이라는 시를 쓰듯 나는 나의 모습을 지금 쓰고 있다.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강렬한 문구로 시작하는 이 시는 현재의 자기를 알기 위해 과거 그 이전, 부모의 존재까지 언급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에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는 말일까? 자신의 태생과 외형을 정해준 것은 부모, '종'이라는 미천한 신분으로 표현되는 근원적인 자아의 모습을 들이밀다가 시 중간에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고 유전적, 신분적 자신의 모습을 거부한다. 누구를 닮은 외모든지, 종의 신분인 부모가 어떻든지, 주어진 태어난 대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한다. 나를 키운 건 바람이라고 그는 항변한다. 부모가 해 준게 없다는 말일 수도 있고 세상의 풍파에 휩쓸리며 가족보다는 외부의 영향을 더 받으며 자랐다는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서정주가 살던 시대는 그랬을 수 있을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로 이어지는 급변하는 우리나라의 국운은 한 시인에게도 자신의 삶이 그냥 개인적인 가족의 울타리만으로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고 하면 위대한 시에 누를 끼치는 걸까?

나를 키운 건 진짜 바람이라고 하면 부모님이 서운해 할까? 잠시나마 엄마처럼 나를 밀착 육아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운해 할까?

그래도 나를 키운 건 팔할의 바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마가 말했다.

"시골에서 데려 온 너는..."

내가 시골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 둘째를 낳았을 때였다. 둘째의 출산을 앞두고 있을 때부터 엄마의 계획이 정해져 있었다. 그 때 내가 살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어린이집이 없었다. 어느 날인가 엄마와 산책을 하며 가는데, 이 산책 자체도 목적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근처에 어린이집이 생긴다는 소문을 엄마에게 흘리듯이 말했기 때문이다. 어떤 건물을 열심히 짓는 공사장이 보였다. 건물의 외형이 전원주택처럼 보였는데그 위치가 애매했다. 거기는 빌라나 상가를 낀 주택이 많은 동네여서 마당이 있는 전원주택은 어울리지 않았다. 저게 무엇이 될까?라는 의문의 물음표가 떠오르고 있는데 엄마는 벌써 공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가서 묻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멀끔하게 옷을 입은 남자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옮기고 있었다. 나는 유모차를 세우고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유모차 안에 이제 3살이 된 첫째는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내년에 4살이 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엄마의 주장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나의 일이고 나의 가정일인데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주장에 휩쓸리고 있었다. 엄마가 의기양양하게 어디서 승전보를 들고 오는 메신저와 같은 표정으로 나에게 돌아와서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옮겨 적으라고 했다. 어린이집이 생긴다고!! 4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며 그걸 주저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였다.

 " 보내야지 니가 덜 힘들고 애도 배우는 게 있다.  나도 니 동생 태어나고 니를 시골로 보냈다."

엄마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하면서 억지를 부리고 싶지만 다 맞았다. 엄마는 덜 힘들고 나도 배우는 게 있었다. 배움이 모두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기는 하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흘려 들었다. 

'내가 3살때 시골에 있었다고?'

하지만 흘려 들은 그 말에 붙은 물음표처럼 내 마음에 강한 의문의 흔적을 남겼다.

둘째가 태어나고 첫째는 어린이집을 한 달 가고 폐렴에 걸려 (아마 새로 지은 건물이라 환경물질에 많이 노출되었으리라고 짐작된다.) 한 달이상을 집에 머물렀다. 엄마가 그런 나를 도와주러 왔다. 왜 애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냐고 했다. 그런데 난 어린이집에 애를 보내는 것보다 집에 이렇게 셋이 있는게 더 좋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 눈도 안 뜬 애를 깨우고 먹이고 옷 입혀서 보내는 게 싫다고 했다. 그리고 첫째가 살림이 어설픈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내가 화장실에 갈 때나 부엌에서 정신이 없을 때 첫째가 아기를 봐주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하는 첫째와 아침마다 실랑이를 할 때 나는 종종 졌다. 또래 애 키우는 엄마들이 나를 걱정했다. 아이 고집을 너무 키운다고, 어린이집에 어떻게든 보내야 한다고, 왜 그렇게 물러터졌냐고? 하지만, 나는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은 날이 많았다. 실랑이에 지치기도 했고 내 마음 속 어딘가 의문부호가 커지고 있었다.

3살 때 엄마와 헤어져 있었다는 말이 나를 내 아이들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부재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아이가 원치 않는 부재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는 5살에 어린이집에 보냈다.

내 육아의 허술함에 대한 변명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나의 심리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어린이집에 만족하지 못해서 안 보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린이집을 2년 보내고 유치원으로 갈아타는 일도 하지 않았다. 내가 느리고 게을러서 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새로운 공간에 적응한다는 것. 사람들은 아이들이 새로운 곳에 더 쉽게 적응해서 이민을 가면 더 잘 지낸다고 한다. 정말 아이들이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겉으로 보내기에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른들의 단정이 아닐까? 난 한 어린이집에 두 아이를 총 7년을 보냈다. 어른들도 새 직장에, 새 부서에 적응할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이들이 어리다고 정말 아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까? 어쩌면 잘 기억하지 못하기에 괜찮다고 치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너살 나의 새로운 시골 생활은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현재 마흔이 넘어서도 나에겐 엄청난 무기력이라는 모습으로 변주해서 나타나고 있다. 매일 새로운 즐거움으로 하루를 채우기 위해 눈을 뜨는 아이와 매일 새로운 두려움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는 아이의 인생은 분명 다를 것이다. 즐거움을 찾는 아이는 자발적이고 선택적인 삶을 살지만 두려움에서 조바심 내면 사는 아이는 비자발적이고 결정당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원해서 무엇을 할 용기보다 무엇이 터질까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삶 속으로 매일을 버텨낼 수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바람 속에서 자라서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랄 수도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온실에서 자란 아이들이 요즘 더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과한 바람 속에서 불안을 짝해서 사는 것이 숨막힐 듯한 온실 속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숨막힐 듯한 온실이 의지 할 데 없는 바람 속에 있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아니 서너살에 온실의 따듯한 시선 하나 느낄 수 없는 서늘한 바람같은 시선 속에 있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에겐 사람과 인생에 대한 뒷걸음질을 먼저 배울 게 될지도 모른다. 온실같이 숨막힐 듯한 애정은 아니라도 조금의 따뜻한 애정 아래 자랐다면 지금의 나가 좀더 달라졌을까?


내가 시골에서 돌아 온 것은 일년이 지나서였다. 엄마가 나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아빠가 그래도 가족인데 함께 해야지 하는 깨달음이 들어서 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를 키운 건 나의 부모는 맞지만 바람처럼 외부의 상황이었다. 숙모가 셋째를 임신했다. 숙모의 임신으로 할머니는 다시 사내아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고 혹시나 모를 손자의 출산을 대비해서 숙모의 어깨를 누르는 노동의 멍에를 조금 벗어주기로 했다. 임신한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정치적인 넓은 아량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치적물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애정표시로 나의 부재만한 것이 없었다. 시골에서 나의 부재는 숙모에게 행복이었다. 문유석님의 말이 맞다. 인간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는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난 또 누군가, 숙모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대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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