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추적 60분에서 중독을 다루며 담당 PD가 알코올 중독으로 진단된 일이 있었다. 젊고 멀쩡해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들에 대한 방송이었다. 사회생활도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에 드러나 보이는 큰 문제는 없지만 알코올 의존, 알코올 중독인 사람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아이 때문에 알게 된 친구 엄마들이나 조금 더 젊은 2, 30대의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니 하루의 끝은 늘 술이었다. 기분이 좋아서 마시고, 우울해서 마시고, 힘들어서 마시고, 쉬는 날이니 마시고. 술을 마시는데 딱히 이유도 필요 없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남편만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 회식이다, 접대다, 동료들끼리 한 잔 하고 들어온다.
술 빼고는 이야기가 안될 만큼 대한민국에서 술은 물만큼, 혹은 물보다 친숙한 존재인 듯하다. 술을 좋아하는 게 흠이 아닌 분위기라 방송에서도 술을 마시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술자리를 콘셉트로 하는 방송 또한 많이 있다. 대중매체를 벗어나 유튜브와 같은 개인방송으로 넘어오면 더욱 과밀하다.
음주운전에 대한 문제제기와 심각성은 널리 알려졌지만 아직도 음주 그 자체에 대해선 문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식사 자리엔 당연히 술이 따라오고 국민 대다수가 음식과 어울리는 술을 추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숙취에 대해 공감하고, 블랙아웃(필름이 끊김)이 모두에게 있는 예삿일인 양 거리낌이 없다.
술을 안 마셔서 음주문화를 이해 못 하고 하는 말이라 할지 모른다. 맞다. 잘 모른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놀이방이 있는 식당에서 몇 번 자리했지만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했다. 술 마시고 이야기하느라 바빠서 아이들끼리 놀도록 버려두고, 아이들 간에 문제가 생겨도 이유도 모르고 귀찮으니 그냥 대충 넘어가자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교육정보를 들을 수 있나 했던 단톡에서도 모든 대화가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기에 나로선 낄만한 내용이나 흥미가 없었고 결국 흐지부지 멀어졌다.
사람들을 만나면 '술을 왜 안 마시냐?'는 질문을 만나곤 한다. 술은 마시는 게 당연한 것. 안 마시는 건 특이한 취향이라 여긴다. 술을 마셔본 적은 있었다. 대개그렇듯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였다. 고1 담임 선생님은 술은 어른에게 배워야 한다며 수학여행 때 모두를 앉혀놓고 술을 권했지만 그때는 내키지 않았었다.
그리고 고2, 친구들이 저녁에 몰래 챙겨 온 초록병들을 꺼내 마시자 했고 대체 그게 뭐길래 기를 쓰고 마시려 하나 싶어 옆에 있다 한잔 두 잔 같이 마시게 됐다. 딱히 맛있거나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닌데 금지된 것을 하는 신남이었던 게 아닐까. 술맛을 본 친구들은 쓰고 맛이 없다며 금방 떨어지는데 과시욕이었는지 두어 명이서 남은 병들을 다 마셨다. 안주도 없이 꿀떡꿀떡. 딱히 술맛을 모르겠다면서도 술술 넘어가기에 물 마시듯 마셨던 것 같다.
그리고 며칠 뒤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갑자기 술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하는 나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술 마시는 것이 굉장히 즐거웠거나 맛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행동을 또 원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한 번의 경험으로 이 정도의 갈망을 느끼는 것에 놀라며 나는 알코올중독에 취약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였다.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실 것 같아서 술을 입에 대지 않은 게. 술 권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시작하면 기둥뿌리 뽑을지 모른다며 손사래 치며 사양했다. 지금 돌아봐도 잘한 선택 같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편하게 속내를 나누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들 하지만 술 없이 이야기 못할 사이라면 굳이 술 마시면서 만나야 할까. 술기운을 빌어 이야기한들 상대가 잘 기억할리 없고 몽롱한 상황에선 건설적인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은 채 부어라 마셔라만 반복한다. 해결되는 건 없는데 잠시 현실을 잊고 싶은 마음에 술에 취하고, 깨어나면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현실에 더 괴로운 것 아닐까?
혼술은 위험하다고 한다. 어디서나 혼자 즐길 수 있으니 그만큼 반복되기 쉽고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지 못한 채 중독으로 넘어가는 게 쉽다.
오래 알지는 않았지만 친하게 지낸 동생에게 얼마 전 뜬금없이 곤욕을 당했다. 10여분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하다 끊었는데 갑자기 사기를 당했다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연락하지 말라며 죽여 버린다느니 급발진을 해서 당황했다. 그 사이 다른 이야기가 있거나 문제가 생겼던 것도 아니라 무엇에 갑자기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밤 술을 들이키는 동생이 이미 술을 마신 걸 아는지라 그만 자랬는데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음날 술이 깨고 카톡에 남긴 말들에 대해 사과를 하긴 했지만 본인도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고 무지성 사과를 받는 나도 찝찝했다. 그 동생을 좋아하지만 가깝고 친하게 지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러지 않겠다는 동생의 말을 믿고 싶지만 매일 밤들이키는 술은 믿을 수 없다. 술을 끊지 않고서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술에 의존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개발한 '알코올 사용 장애' 선별검사인 오디트(AUDIT-K) 검사가 있다. 음주습관 등 10개 문항 평가를 점수화한 오디트는 ‘정상 음주’(남 0∼9점, 여 0∼5점), ‘위험 음주’(남 10∼19점, 여 6∼9점), ‘알코올 남용·의존’(남 20∼40점, 여 10∼40점)의 3단계로 구분된다. 세 번째 단계는 전문 병·의원이나 알코올상담센터 등에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하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더 알코올중독에 취약하다고 한다. 당신은 몇 점인가?
술 마시는 게 너무 당연한 사회다. 다 같이 마시다 보니 음주 한계에 대한 기준치가 너무 높아졌다. 서로 자신이 보유한 술장고와 컬렉션을 자랑스레 보이고, 주류세일엔 오픈런 현상이 일어난다. 술의 폐해에 대한 경고는 줄고 24시간 어디서나 저렴하게 술을 마신다. 해외에선 음주문제를 줄이기 위해 주류 가격을 높인다는데 한국에선 서민 물가를 걱정하며 술값이 내린다. 소주가 서민의 친구라며 주류세 상승에 대한 논쟁 자체가 터부시된다. 매해 3조 가량의 주류세를 걷지만 1%가 아닌 0.1%도 음주 폐해 예방사업에 쓰이지 않는다. 흡연보다 음주가 일으키는 사회적 비용 문제가 크지만 음주문제에 대한 예산은 매해 더 감소되어 왔다. 이 정도면 술 권하는 사회 아닌가?
술 말고 뭘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거리가 술인데 이것마저 뺏아가면 어쩌냐 한탄한다.술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면 유일한 즐거움인양 느껴질 수 있다. 술은 가장 빠르고 간편하며 싸게 즐기는 현실 도피처다. 그래서 조금 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여가활동들이 버겁고 귀찮게 느껴져 등 돌리게 된다. 책을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어디를 가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해도 부담스러워서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껏 혹독하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보낸 시간들이 만들어낸 결과다. 산업화시대는 지난지 오래라는데 아직도 제 몸과 시간을 출퇴근길과 업무에 갈아 넣는 삶을 살다 보니 시간을 내어 찬찬히 무언가를 즐길 여유가 없다. 힘듦을 간단히 술로 해소하고 다시금 일터로, 제자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한다.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경험하고 생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숨 가쁜 일상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각박한 사회가 술만이 안식처인 양 젊음을, 가고 오는 모든 세대를 유혹하지 않기 바란다. 음주를 개인의 의지 문제만으로 여기지 않고 판매점을 제한하고 술에 대한 관대함을 접어둘 때가 됐다. 대신 각자의 소박한 즐거움 찾을 여유를 이제 조금 더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