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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개발자의 글쓰기
Oct 30. 2022
고등학교 1학년 때 화학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2학년 말에 '유기화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뀐 첫 해. 본고사라는 것이 잠시 있었던 적이 있다. 보통 세 과목을 지정해서 아주 어려운 주관식 문제를 풀게 되는데, 이과는 국어와 수학 그리고 나머지 한 과목으로 영어 또는 과학을 채택했다. 나는 좋아하는 화학을 시험보는 대학을 준비했다.
과목별로 본고사를 준비하는 반이 따로 있었고 일반 문제집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은 본고사용 문제집을 풀었다. 화학 문제집에서 '탄소화합물' 단원은 아껴두었다가 제일 마지막에 풀었는데, 남은 문제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재미있고 신나는 부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그 단원이 '유기화학'으로 불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평생의 밥벌이 수단이 되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기초과목만 듣고 2학년이 되면 전공과목을 본격적으로 듣게 된다. 개강하면 사도 될 유기화학 교과서를 나는 1학년 겨울방학에 미리 사서 가방에 소중히 품고 다녔다. 그만큼 좋아했다.
1학년 2학기에 새로운 유기화학 교수님이 부임하셨다. 드디어 전공과목을 듣는 2학년 1학기 개강. 새로 부임하신 교수님은 나의 첫 유기화학 강의를 맡으셨고, 나는 그 교수님의 첫번째 전공수업 학생이 되었다. 교수로 임용된 후의 첫번째 전공 강의였던 만큼 열의가 대단하셨는데, 결강이 있거나 진도가 생각보다 늦어지면 아침 7시 또는 평일 저녁에 반드시 보강이 있었고, 중간중간의 퀴즈를 제외하더라도 정식시험만 한 학기동안 총 6번이었다. 시험은 여러 장의 커다란 시험지에 문제가 앞뒤로 프린트 되어 있었고 문제 밑에 있는 공란에 답을 써서 제출하면 채점 후 모범답안과 함께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항상 과대표가 모범답안을 교수님께 직접 받아 과학관 복사실에 맞겨 놓았는데 그 당시 과대표는 나였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나는 항상 교수님을 찾아뵈었고 내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 1학년 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과목에서 1등은 정해져 있었는데, 나의 첫 유기화학 수업에서의 1등은 바로 '나'였다. 이것이 나와 선생님의 첫 인연이다.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 유기화학 교수님 두 분과 상담을 했다. 한 교수님은 논문실적을 중요하게 말씀하셨고 다른 교수님은 연구실에서의 배움과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나는 배움과 경험,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시는 교수님 연구실로 가기로 했다.
다니던 학교 외에 대전에 있는 다른 학교도 함께 지원했었는데, 대전의 학교는 국가가 지원해주는 학교여서 등록금도 모두 나라에서 지원해주고 사회적인 인지도도 훨씬 높았다. 얼마 후 대전에 있는 학교에 합격하여 면접을 앞두게 되었다. 그 사실을 교수님께 말씀드렸는데 며칠 후에 학과장님이 나를 호출하셨고, 강요하듯 자대 진학의 장점에 대해 열변을 토하셨다. 며칠 후 과학관 앞의 벤치에서 학과장과 교수님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하는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학과장의 호출이 그 교수님의 부탁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뒷모습이 계속 머리 속에 남았다. 대전 학교의 면접이 있던 날,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쪽지를 냉장고에 붙여두고 새벽 다섯시 반에 몰래 집을 나서서 학교의 과방에서 나머지 아침잠을 잤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교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게 되었고 내 평생의 선생님이 되셨다. (연구실마다 지도교수에 대한 호칭이 '교수님' 또는 '선생님'으로 나뉘었는데, 우리 실험실은 '선생님'이었다.)
30대 초반에 학교에 부임하셔서 작년에 환갑을 맞이하셨으니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된지 거의 30년이 되었다. 나도 내년이면 어느덧 스무살에서 삽십을 더한 나이가 되어간다. 성인이 된 후 부터 인생의 중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선생님께 지식만 배웠던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자세도 함께 배웠다. 선생님께서 이용하시던 출퇴근용 가방과 자동차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소탈하신 분이셨다. 강의 전날에는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시고 실제와 똑같이 시간을 들여 강의 연습을 하실 만큼 교육자의 역할에 충실하셨다. 나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배움과 경험을 통한 성장이 된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고, 성장통을 겪을 때면 고향같이 찾아가게 되는 안식처가 되어 주셨다. 최근에도 직접 유기화학 교재를 만들어 출판하시는 모습에서 나도 글을 써봐야겠다는 동기를 만들어 주셨고, 2년째 PT를 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스스로의 관리에 소홀했던 나 자신을 모습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결혼이 늦었던 나에게, 공부나 학위보다는 "결혼해서 애새끼(좀 거칠지만 그분의 표현을 직접 옮긴다) 낳고 남들과 똑같이 사는게 더 중요하다"고 늘상 말씀하셨던 나의 선생님. 학교 다닐 때는 불만도 있었고 대든 적도 있었지만 졸업할 때 왠지 모를 아쉬움에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지금도,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시기에 그 울림에 대한 반응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되돌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