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냐? 나도 아프다. 마음이.
어렸을 때 일본에서 생활하다 보니 아무래도 점점 한국어가 불편해지면서 집에서도 일본어를 쓴다고 엄마 아빠한테 혼나곤 했었는데 ‘아이씨’만큼은 누구보다도 원어민답게 구사했었다.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엄마 아빠가 아이씨라고 했었겠지. 그렇다고 남에게 하는 건 아니고, 혼잣말로 감탄사처럼 쓰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쓰던 표현이라 지금까지도 당연히 쓴다. 이런 급이 낮은 표현을 쓰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마음에 안 들지만,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그야말로 기분이 불쾌하거나 못마땅할 때 자동으로 나와버리니 어쩔 수가 없다.
혼자 이 말을 내뱉게 될 때도 아 진짜 또 왜 이러니하며 자기혐오에 빠지는데, 남 앞에서도 저질러버린 적이 있어 매우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진 적이 있었다. 3번 정도가 생각이 나는데, 첫 번째, 대학을 졸업하고 시각장애인 복지관에서 근무할 때, 옆 자리에 시각장애인 직원분이 계시는데 일을 하다가 무언가에 손가락을 찔렸는지 너무 아파서 ‘아이씨’라고 말해버렸다. 여리여리한 20대 소녀라고 생각하고 계셨을 텐데, 갑자기 아이씨라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워딩에 그분이 당황하셨 것 같아,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했던 기억이 있다.
두 번째, 남자친구와 연애 초기에, 뭔가 그럴만한 상황이 있었겠지만, '아이씨'라고 해버렸다. 잘 보이고 싶었던 그 멋진 남자친구 앞에서 아이씨라니. 너무나도 부끄럽고 창피해서 변명조차도 못하고 나에게 실망을 하고 차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지금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휴~~ 콩깍지가 쓰여있었는지 뭔 말을 해도 예쁘게 들렸나 보다.
세 번째, 우리 반 학생들 앞에서 ‘아이씨’라고 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계시는 교실에서만큼은 욕을 자제하자고 지도를 해오던 내가 나쁜 말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민망했다. 아이들이 앞 뒤가 다른 쌤이라고 생각할까 봐 적잖이 나도 놀랐지만, 속으로는 너네가 더 심한 욕 쓰잖아.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라며 합리화시키고 뻔뻔한 척 넘어갔었더랬다.
그리고 어제, 그 실수를 또 저지르고 말았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평상시에 10시에 자던 취침시간을 12시로 늦춰가며 쉬는 시간도 없이 '학교, 학원, 귀가 후 공부'의 생활을 성실히 해 오던 아들에게다. 12월의 추운 날씨에 패딩조차도 안 입고 다니길래 감기라도 걸릴까 봐 걱정을 한 것이 아니라, 감기에 걸려서 공부를 못 하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제발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마스크 좀 하고 다니라며 잔소리를 했지만, 아들 귀에는 닿지 않았다. 중딩은 추위를 안 탄다며 춥게 키워야 된다고 누군가 얘기를 했지만, 그래도 이번 기말고사마저 망칠 수는 없었다. 매일 부지런히 비타민과 도라지청을 챙겨주었다.
보건샘이 교내에 독감이 유행하고 있으니 학급 아이들에게 독감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의 메시지를 보내시기도 하시고 실제로 우리 반에서도 11월부터 꾸준히 2명씩 번갈아 가며 독감 환자가 발생해 왔었기에 아들에게 너희 반은 독감이 괜찮은지 자주 확인했다. 그때마다 독감으로 결석하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하기에 중딩들이 고딩들보다 튼튼한가보다 하고 건강하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학원을 다녀온 후 아들이 아프다고 한다. '그래 요새 무리를 했으니 피곤하겠지.' 많이 아프단다. '으이구 공부하기 싫어서 이러나.'
"혹시 너희 반 독감환자 있어?"
"응 3명."
“아이씨”
속으로는 '아이쿠 아들 앞에서 아이씨를 해버리다니'하며 미안하고 민망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엎질러진 물. 이미 흘러넘치는 분노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따뜻하게 입고 다니랬지? 엄마가 매일 너희 반에 독감 걸린 애 있는지 물어봤어? 안 물어봤어? 독감이 엄청 요새 유행한다고 했잖아. 마스크는 왜 안 쓰고 다녀. 공부만 하면 뭐 해 시험 못 보면 말짱 도루묵이야.....!!!!"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그냥 자고 싶다는 아이에게 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만, 사실 시험이 코 앞이니 조금이라고 책을 보고 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큰 그림을 그리며 컨디션이 회복되면 내일 아침 일찍 깨워서 오늘 못한 공부를 시키겠다는 속마음은 감춘 채 일찍 재우기로 했다.
그다음 날 아침, 그동안 부족했던 수면시간도 채우고 상쾌하게 일어날 줄 알았던 아이가 여전히 컨디션이 영 안 좋다. 열이 살짝 나고 어지럽고 목이 아프다길래 그냥 목감기인가 생각했다. 오전에 푹 쉬게 하고 점심식사를 한 후 병원에 같이 가려고 하는데, 14살짜리 아이가 입을 벌린다. 밥을 먹여달란다. 가끔씩 8살 어린 동생이 하는 짓을 따라 하는 중딩이다.
사춘기 아들과 잘 지내보겠다고 평상시에 칭찬하고 사랑한다 하고 안아주면 뭐 하나. 아플 때 힘들어할 때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걱정을 해줬어야 하는데, 너를 믿는다던 이 엄마는 아이에게 아이씨를 발사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지만, 그래놓고 많이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다행히도 아들은 아파서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이 말에 대한 반응은 없다. 그 말이 나중에 상처로 안 남기를 바랄 뿐이다.
다 나으면 엄마가 사과할게.
제발 우리 아이들이 나로 인해 이 말을 배우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확진을 확인하곤 또 저질러버렸다. 흑.
놀라고 화나고 못마땅할 때, 다른 어머님들께서는 어떤 감탄사를 내뱉는 걸까?
품격 있는 아줌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