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패션 잡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자의 옷장 Jul 15. 2024

본능적 멋

 멋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즐겨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는 필자의 굳은 아집으로 만든 결과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대화에 섞이기 위해- ‘멋’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번은 최근에 느낀 감정에 대한, 아집이 아닌 타인을 통해 경험한 일반적인 ‘멋’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최근 클래식 남성복에 관심을 갖는 지인들이 많아, 그들에게 클래식 의복들에 대한 역사와 그것들을 대해야 하는 태도, 만드는 방법 등등을 아주 가볍게-마치 교양수업을 하듯- 설명 할 기회가 많았다.


더 나아가 감사하게도 그들의 호기심이 동해 같이 쇼핑을 나가 ‘어떻게 입는 것인지’, ‘왜 입는 것인지’에 대해 옷을 직접 추천할 수 있는 상황도 주어졌다.


재밌는 것은 옷을 입어본 후 모두 “이전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분명 <바뀐 나>를 거울을 통하여 본 이후에 나온 말이었다.


필자는 아직도 새로운 옷을 입고 거울을 보는 지인들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바뀐 나>는 무엇인가?


필자는 이에 대해 깊게 고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뀐 것은 없다.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나>를 마주한 것’이 더 맞겠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올바른 나>란 <나에게 맞는 옷을 입은 나>라고 이해하면 조금 편할 것 같다.




 클래식 옷이 주는 가장 큰 힘은, 브랜드나 디자인에 깊게 연연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여기서 디자인이란 <기교>, <변주>라고 생각하시면 편하겠다.-


고로 클래식 옷을 입었을 때만이 옷의 힘 그 자체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더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정제되었단 의미이며, 그 정제됨이 살아남았다는 이유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고로, 변하지 않는 것은 오랫동안 살아남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번 경험을 통하여 이것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성복에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새로운 깨달음이다.


남성복에 본능이 있지 않는 한, 지인들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이 적힐 수 없었다.


남성복의 본능은 오랜 시간 남성들에게 입혀온 이미지를, 오랜 시간 살아남아 입혀온 이미지를, 남성복의 근원을 개인에게 온전히 부여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는 DNA에 적혀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는 그저 <예쁘다.>의 범주가 아닌 <옳게 된 옷과 사람의 조화>라고 판단한다.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대부분의 남성은 수트를 입는데 그 안에서 <올바른 나>를 발견하냐는 것이다.


이는 필자에게 있어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다.


클래식 옷의 정점에 있는 것이 수트인데, 그것을 대부분의 남성들이 입음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옷이 남성들에게 입히지 않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기성의 수트는 예의가 없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기성의 수트를 욕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옷장에도 기성의 수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필자는 ‘옷의 설명이 부족하다.’라고 결론 내렸다.


수트를 입을 때는 <어른>이 필요하다.


누가 입고, 어디서 입고, 왜 입고, 어떻게 입고, 무엇을 입고, 언제 입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줄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회적 상식에 의해 설명될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의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수트가 한 벌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수트는 어느 지역-혹은 나라-에서 기반한 것인지, 디테일들은 왜 이런지, 입을 때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몸에 맞아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일반 소비자들에게 주어지지 않으며, 이 또한 일반 소비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수트를 입더라도 입은 것이 아닌, 역사도 철학도 뭣도 없는 그저 옷의 종류 중 하나로 치부될 뿐이다.




 물론 필자의 지인들도 별난 필자와는 달리, 동일한 일반 소비자들이었다.


하지만 백문이불여일견일까?


그들에게 설명 이전에, 위와 같은 배경지식에 기반한 옷을 직접 선별하여 입게 하였을 때는 수트나 다른 클래식 옷도 그저 <옷>으로 치부되지 않았다.


이미 <옷>을 넘어서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들의 표정을 그렇게 해석한다.




 제목과 같이 <본능적 멋>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DNA에 적힌 남성의 역사를 입었을 때, 자신과의 합일을 느끼는 것 말이다.


클래식 옷만큼 남성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만이 살아남은 이유이고 <남성의 입음>에 근원이기 때문이다.


위베르 드 지방시(Hubert de Givenchy)-그 지방시가 맞다.-는 “클래식하다는 것은 절대 지루하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맞다.


클래식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세상의 기교와 변주 때문에 그것이 묻힌 것뿐이다.


클래식은 고로 바흐(Johann Sebastian Bach)와도 같다고 판단한다.


그를 기준으로 많은 것이 파생되었지만 바흐는 바흐이고 기준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클래식 옷은 클래식 옷이고, 바흐가 지루하지 않고 위대한 것처럼 클래식 옷 또한 위대하다.




 사실 일반 소비자들에게 이것은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물량공세 시대에서, 소비자를 만들기 이전의 시대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게 된다면 지루함은 전부 사라질 것이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그곳에 <본능적 멋>이 있기 때문에.




* 이 글 등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Unseen Histories


15JUL2024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에 남성복의 거리를 꿈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