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복과 인문학
남성복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것을 패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이라고 보고 있다.
그렇기에 남성이 남성복을 입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회로는, 현 세상에서의 인문학의 부재라고 해석하고 있다.
남성복이란 본래 인문학이다.
이 주장을 본 독자들은 의아함을 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살을 덧붙이겠다.
여기서 남성복이라는 것은 오로지 클래식 남성복만을 의미한다.
클래식 남성복이란 본래 남성들에게 오랜 시간 입혀온 것들이다.
그리고 역사 속에 함께 했고 각 의복마다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역사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순간, 그리고 그 시간이 존재하는 순간 이미 남성복은 인문학에 가깝다.
인문학이라는 것을 조금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쌓아온 것들이 겹쳐야 한다.
이것은 항상 주창하듯, 삶의 모습이라고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인문학이란 본래 인간을 향한 학문이다.
인간의 삶이나 사고 그리고 그 본질에 대한 것이다.
더욱이 그렇기에 삶과 함께한 의복은 중요하고, 남성복은 삶에 기반한 것이기에 인문학과 밀접하다.
얼마 전, 의류학을 전공한 친구는 수트를 입고 있는 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트 안불편해? 편하게 일상복 입지?”
이 질문에 “수트는 원래 일상복이었어. 불편할 것도 없지.”라고 답하였다.
이 대답을 하는 동시에 달려오는 개인적인 질문이 있었다.
‘우리의 일상은 이전과 다른가?’
우리의 일상은 이전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물론 달라지긴 했다.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기술들이 늘어났으며, 그 기술들은 인간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가며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옷을 입는 기본적인 생활 행동은 전혀 바뀐 것이 없다.
그저 그 사이에 기술이 들어왔을 뿐이다.
기술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줬다.
윤택하다고 표현했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편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겠다.
편함의 발전은 취미에 가까운 인간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영상매체가 그러하다.
필자는 영상매체가 책을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상은 정보의 전달을 기준으로 책보다 훨씬 많이 노출되며, 빠르게 소모된다.
그러나 영상은 인간들에게 시간을 오래 주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우리는 부분, 부분에 멈춰 고민을 하게 된다.
그 글의 저의를 꿰뚫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영상은 그 고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시각이 아닌 청각으로 존재하며, 청각으로 휘발되기 때문에 해당 글(?)에 머무는 시간을 훨씬 줄임과 동시에 다시금 새로운 글이 귀로 들려온다.
이는 인간의 사유에서 책과는 다른 거리감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숏폼의 영상이 대세인 시대이니 그 거리감은 더욱이 달라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렇듯 정보의 취합이나, 사유의 모습 또한 인간이 선택한-사실상 문화가- 것은 너무나도 편하다.
이는 고민과 사유에 기반한 인문학의 붕괴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에 대하여도 고민하게 만든다.
이러한 편함의 모습은 비단 영상매체 뿐만이 아니다.
의복을 입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이 편해질수록 의복을 입는 것 또한 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분명 삶의 모습 자체가 바뀜에 따라 나타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닐까 한다.
결국에 남성복이 사장(死藏)되고 있는 것은 ‘편함의 추구’때문이지 않는가?
모두가 수트를 불편해하고 셔츠를 불편해하며 구두를 피하고 오래된 의복을 불편해한다.
남성들은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의복을 피하게 되었다.
더하여 시장의 흐름으로 볼 때, 이는 이득을 취할 수 없음에 사장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남성복을 사장 시킨 것은 남성들 본인이며, 남성들이 남성복의 역사와 가치를 이 세상에서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한 남성들이 오랜 기간 입어 온 남성복의 역사와 가치의 붕괴는, 인문학의 붕괴와도 모습이 닮아있다.
의복에서 편함의 추구는 기술의 발전과도 연관이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하고 편한 옷들이 대량생산되기도 하며, 더욱 화려하고 전문적인 디자인의 구현을 대기업들은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케팅 방법의 다양성이 증대함에 따라 인간들에게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고, 유행도 만들어 내니, 인간은 고민없이 선택할 수 있는 채널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마케팅이란 의복 외적인 자본이며, 의복 자체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자본은 마케팅을 향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고, 마케팅은 정보의 채널에 깊숙하게 작용하며,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인간들은 이 사이에서 소비가 이루어지며 마케팅 홍수로 인하여 과거의 것보다는 현재의 것들에 더 많이 노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로부터 멀게 하며 과거의 향유와 사유를 멈추게 만든다,
또한 마케팅 채널 자체가 대형 SNS들이니 이것들에 대한 노출도는 말을 다 했다.
더욱 재밌는 것은, 기업들은 채널에 자본을 들여 마케팅을 시작하지만, 그것의 노출 확장은 일반 소비자들이 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이 도화선을 지펴 소비자들에게 유행시키고, 유행이 채널내에서 확장됨에 따라 자본이 자본을 벌어들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그곳에 고고한 철학을 띤 인문학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자본만이 존재하고 자본만을 뽐내는 세상이 아닌가?
아주 흥미롭게도, 남성복의 가장 대표되는 수트는 사실 자본-또한 마케팅도-과는 거리가 멀다.
수트의 존재의의의 시작은 ‘검소’이다.-이는 추후 필자의 졸업논문 내에 적힐 예정이다. 그때 더 자세하게 수트의 전체적인 역사에 대해 깊게 설명토록 하겠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기술과 마케팅 채널들을 생산한 럭셔리 브랜드들과, 대량생산하여 자본을 위해 장사를 하는 자본주의의 것으로, 수트가 추구했던 검소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있다.
수트의 위치성은 럭셔리 브랜드와 대량생산과 같은 자본과 거리가 멀다.
수트는 항상 같은 위치에 있었으며 마케팅을 할 필요가 없는 의복 중 하나이다.
현재 ‘패션기업’들이 하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의복에게 새로운 위치성을 제공하며 새로운 것을 파는 것과 달리, 그저 묵묵히 그 위치에 서있다.
이는 또한 편하게 소비자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입힘의 문제를 배제하고, 럭셔리 브랜드와 대량생산하는 브랜드와 같이 앞서 말한 듯 수많은 마케팅 채널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더하여, 자본이 만들어 내는 유행에도 섞여 있지 않으니 정보 취득의 편함과 자본을 위한 자본의 증식과도 거리가 멀다.
또한 인간의 삶과 자연과 밀접하고, 입는 방식과 그에 따른 사유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니 이는 결국 앞서 이야기한 인문학과 상당히 닮아있다.
어찌보면 인문학의 붕괴는 남성복의 붕괴와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 보인다.
의복의 발전은 기술의 발전에 비해 없다시피하다.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의복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같이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인간의 삶의 모습에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입고, 세탁하고 다시 입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다.
입힘의 가치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의복은 의복이 가진 기술이 아닌, 앞서 말한 다른 기술을 새로운 방면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 어딘가에 속해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의복의 발전은 의복 외 기술의 발전에 편승한 것이며 편함과 자본 잠식의 증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본에 잠식당한 사위어가는 인문학과도 같다.
솔직한 얘기로 이는 비단 남성복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현 사회를 바라보자면 모든 것에 ‘자본’이 중심이 되어보인다.
‘자본’은 중요하다.
자본주의도, 시장경제도 그 모든 것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중심에 사위어가는 인문학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그리고 같이 사라져가는 남성복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다.
남성복은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남성복이 사라진 뒤 남성복을 찾으면 이미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꼴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에 남성복을 잘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넘기기 위해서는, 이것의 가치를 남기고 인문학을 같이 전파하는 길이라 생각하기에 필자는 오늘도 글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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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Unseen Histories
10SEP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