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서 영원히 물결처럼 부서질 당신
어느 날 우연하게도 무수히 쌓여있는 짐들 사이에서 옛날에 썼던 캠코더를 발견했어요. 당신과 내가 옛날에 썼던 캠코더였어요. 기억하시죠? 이 캠코더를 마지막으로 손에 쥐고 있었을 때는 단지 11살에 불과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저 또한 당신의 나이가 됐어요. 그래요. 시간이 많이 흘렀죠. 당신과 함께 했었던 후덥지근하고 텁텁했던 여름날이 기억나요. 축축한 슬리퍼, 방의 더위를 채 커버하지 못하고 무심히 돌아가던 선풍기, 호텔 안 어지럽게 놓여있었던 짐들, 당신 등에 묻어있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무수한 모래들, 물에 축축이 젖어 얼굴에 딱 붙어있던 머리카락... 캠코더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기억들은 저의 머릿속에서 그렇게 파편화돼서 남아있어요. 마치 파도의 잔물결처럼 기억이란 그렇게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었을까요. 당신의 뒷모습이, 당신이 먼발치를 바라보며 지었던 표정들이, 당신의 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려 어루만졌던 손길이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캠코더에 있는 영상들을 봤어요. 이제는 캠코더는 구식의 산물이라 현재의 HDMI 케이블로 연결하는 데에 꽤 많은 애를 먹어야 했죠. 캠코더 안에 있는 영상들은 당신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었어요. 11살의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태극권을 하던 당신, 당신이 저를 향해 장난기 있게 말하던 목소리, 심지어 그날의 후덥지근하고 습기로 가득 차 꿉꿉한 냄새로 가득 찼던 방의 정경 마저도요. 그 캠코더의 영상을 멍하니, 오랫동안 바라보았어요. 캠코더는 그렇게 당신과 우리를 둘러싼 그 모든 순간을 짧게라도 온전히 기억하고 있는데, 저의 기억들은 왜 당신을 온전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나 연약한 것이었을까요. 사람의 기억이란 왜 파편화되어서 매 평생의 순간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걸까요.
캠코더의 영상에서 제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던 순간을 봤어요. 11살의 저는 캠코더를 들고 당신과 장난스럽게 영상을 찍는 걸 좋아했어요. 마치 제가 TV속의 리포터가 된 것 마냥 행세하면서 당신을 줄곧 인터뷰하곤 했었어요. 제 기억 속에선 항상 당신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맞장구 쳐주었죠. 제 기억 속에선 그 모든 순간들이 행복한 줄 알았어요. 당신의 머리칼이 햇빛에 받아 빛나는 순간을 기억하고, 당신이 선글라스를 끼고 장난스러운 미소로 저를 바라보았던 순간들을 기억해요. 캠코더를 들고 있을 때에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본 캠코더의 영상에는 제 기억 이외의 순간들이 존재했어요.
캠코더 속의 영상에선, 제가 당신에게 여느 날처럼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11살 때 어땠나요?'라고 물어보았는데 당신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지면서 화내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 순간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의 표정은 항상 웃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캠코더는 저를 더러 제 기억이 틀렸다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추억 한편 속에는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당신의 모습이 있다고요. 어릴 땐 한없이 강해 보였던 당신도, 실은 그 뒷모습에 연약함을 감추어 두었던 거겠죠. 사람이란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한없이 연약한 존재이니까요. 하지만 11살의 저의 시선에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어요. 당신은 저 몰래 숨죽여 울었던 걸까요? 당신은 꿉꿉했던 그 여름날 한없이 무너져가는 당신의 파편들을 제 앞에서는 최대한 주워 담으려고 했었던 걸까요? 31살, 제 기억 속 마지막 당신의 나이가 되어버린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사실 캠코더를 짐 속에서 발견하기 이전, 저의 꿈에서는 당신이 나왔어요. 어느 클럽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단순히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과 저는 마주 보고 서 있었어요. 저는 가만히 서있었고, 당신은 춤을 추는듯한 행동을 했죠. 하지만 사이키 조명 때문에 당신의 연속된 동작을 볼 수는 없었어요. 당신의 모습과 당신의 추는 춤은 사이키 조명 때문에 조각조각나서 온전히 당신을 바라볼 수 없었죠. 하지만 꿈에서 깬 이후에도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는 건 당신이 결코 즐거워서 춤을 추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당신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죠.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서 그런 몸짓을 보였던 것이었고, 그렇기에 당신은 저를 바라보지 못했어요. 그 꿈은 너무 서글펐어요. 당신의 환영이란 그렇게 조각조각나서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남게 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아마도 저는 당신에 대해 영원히 무지하겠죠.
문득 지금 다시 떠올려보니 이런 기억도 있었어요. 관중들이 무대로 나와서 가라오케를 부르는 그런 행사에 있었는데, 그때 제가 아버지에게 같이 무대에 나가자고 제안하지만 아버지는 왠지 모르게 슬픈 표정(혹은 짜증 났던가?)을 짓고선 하기 싫다고 말하셨죠. 결국 저는 혼자 나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아마 R.E.M의 [Losing My Religion] 이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아요. 그러고선 아버지는 저를 두고 그대로 혼자 숙소로 가버렸죠. 그 뒤로 저는 끊임없이 호텔을 방황했어요. 같이 이전에 놀았던 언니 오빠들이랑 놀기도 했고, 같이 오락실 게임을 했던 어떤 남자애랑 키스를 하기도 했어요. 그 뒤로는 골목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요, 그 나이에선 이해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플래시백처럼 지나가요. 제가 몰래 지켜보았던 키스하는 커플이 사실은 동성이었던 것도, 그 남자애랑 키스했을 때 아무런 느낌이 안 들었던 것도 모두 혼란스러웠어요.
제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서 한 가지 깨달은 건,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이 마치 그때의 그 순간과 느낌이 유사하다는 거예요. 길을 잃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이 찾아오고, 오해하고, 혼란스럽고, 방황하고... 그렇기에 삶에 어떤 순간에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이와 영원히 엇갈리기도 하고 희미한 새벽녘처럼 짓누르기도 하겠지요. 당신도 아마 이런 점을 느꼈겠지요. 당신도 그렇기에 연약했던 거겠지요. 기억이란 그렇기에 무지와 불안의 형상화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점들이 때로는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저도 누군가에게 영원히 알 수 없는 뒷모습을 남긴 채 떠나게 되는 걸까요? 어렴풋이, 잡힐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남게 될까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당신을 꼭 안아주는 거였어요. 그래요. 꿈속에서 춤을 추는지 고통에 신음하는지 알 수 없는 사이키 조명 사이의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저는 당신을 안았어요. 그게 단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슬픔의 흔적들을 조금씩 밟아가는 것, 그리고 기억 속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다짐을 가지는 것. 저 또한 한 없이 연약한 존재이기에 당신에게 닿을 순 없는 거겠지요. 그래서 저 또한 캠코더 영상을 끄고 숨죽여 울어요. 그리고 꿈결 속에 남아있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기에, 그래서 되려 당신과 어떤 여름날의 그 모든 순간에게 영원을 느껴요.
Rating: ★★★★☆
[R.E.M-Losing my Reli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