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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정민 Jun 02. 2024

기억, 잊혀진다는 것에 대하여

한 몸 같은 친구 한올의 이야기다. 


한올은 잊혀진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반복된 이혼과 재혼, 친척·가족들의 과오들, 경제적 궁핍, 혼란한 청소년기 등 잊혀지고 싶었던 것들이 고향을 벗어났을 때 잊히는 듯했다. 공간이 바뀌면 기억의 시간 또한 단절되리라 생각했다.


한올의 인생은 시작부터 불행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동네에서 인정받으며 가게, 부동산 등 재산을 불려 나갔다. 옆 마을에서 시집온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게를 운영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해 헌신하셨다. 다만, 한올을 출산 한 이후 계속되는 유산으로 몸과 마음이 상했다. 수년 후 어머니는 동생을 낳으셨고 가정은 행복해 보였다.   


한올이 자란 고향 마을은 도박쟁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이종형제는 여러 방을 갖춘 도박장과 다방을 운영했다. 스타벅스 이상의 인기를 누리던 그곳은 여자 종업원이 남자 손님을 맞았다. 도박에 빠지기 시작한 아버지는 매일 같이 그곳을 들락거렸다. 어느 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한올은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날 아버지와 한 여자의 동침 장면은 어린 한올에게 잊혀지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각자 다른 곳으로 갔다. 오히려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한올만 배다른 동생, 어린 친동생과 고향에 남게 되었다. 수년간 친척 집을 전전하며 흘린 눈물 또한 잊혀지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   


도시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는 한올과 친동생을 시간차를 두고 불러들였다. 다방 종업원이었던 새어머니는 한올의 학교에서의 왕따, 친동생의 교통사고, 불행한 중고등학교 생활에 큰 관심이 없었다. 두 분의 새로운 인생에 관심이 더 많았다. 한올 또한 새로운 행복을 갈망했다. 새로 태어난 동생이 행복과 안정을 가져다줄 거라 믿었다.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친동생의 가출과 삐뚤어짐, 아버지의 또 다른 외도로 청소년기의 한울은 분노와 슬픔으로 세상과의 이별을 생각하기도 했다. 어느 날 새어머니는 한올에게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하셨다. 아버지 찾기에 나선 한올은 또다시 아버지와 같이 있는 여자를 보고 살인의 충동까지 느꼈다. 모든 기억을 잊기 위해 한울은 떠나야만 했다. 


고향을 떠난 어머니는 새로운 분과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새 아버지는 월남 참전 후 전처와의 이혼으로 어려울 때 어머니를 만났다. 새아버지는 평소 불안을 억제하며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술은 모든 걸 한순간에 파괴적으로 만들었다. 한올이 어머니를 찾았던 어느 날 가스를 틀고 라이터를 들고 있던 장면은 마치 전쟁터에서 수류탄을 들고 있는 군인의 모습처럼 깊게 각인되어 버렸다. 


세월이 흘러 한올은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연인이 몇인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잊혀진 기억이 되살아날까 두려워 거리두기를 한다. 두 번째 어머니는 얼마 전 고인이 되었다. 친어머니는 새아버지와 여생을 함께하고 계신다. 한올에겐 잊혀지고 싶은 기억들이 오히려 시간의 뒤로 다시 뒤로 강하게 연결된 듯하다.   


한올은 늘 말했다. ‘나는 내 기억을 지배하는 사람들처럼만 안 살면 돼’. 나는 친구 한올이 잊으려고 했던 기억이 그를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강하게 했다고 믿는다. 부서진 잔해 위에 기억의 비를 세우듯, 그는 아픔을 기억하며 일어서고 나아갔다. ‘잊혀진다’는 것은 기억의 용량 한계와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새로운 기억이 예전 기억을 밀어내고 차지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좋았던 것, 싫었던 것 모두 잊혀진다는 것은 새로운 기억들과 연결되어 있다. 불행한 과거의 기억은 현재를 살아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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