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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as Feb 04. 2023

동그라미 그리고 1천억을 번 예술철학자 - PAK(1)

The Merge / The Fungible

Murat Pak(이하 Pak)은 The Lost Poet, Censored, The Merge 등 다양한 NFT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크립토 아티스트이자, 개발자입니다. 솔직히 Pak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Pak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대체로 직관적으로 느끼기 어렵고 복잡해서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죠. 트렌드에 영합하지도 않습니다. 대중적인 미학보다 철저히 크립토 정신을 좇고 블록체인의 기술적 본질을 드러내죠. 이게 대체 뭔가?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럼에도 크립토 아티스트 중 가장 큰돈을 벌었으며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팬덤도 상당하죠. 조오금 머리를 써가며 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볼까요?

Pak 트위터 계정

Pak은 'Archillect'라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트위터, 페이스북, 핀터레스트 등 소셜 미디어에서 사람들의 좋아요 등 반응을 고려해 이미지를 큐레이팅해 주는 인공지능 서비스예요. 다수의 사람들이 가진 취향과 최근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큐레이팅된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죠. 이 서비스는 큰 인기를 얻어 현재 트위터에서 300만 팔로워를 확보하고 있으며, 일론머스크도 관심을 보인 바 있습니다.

Pak이 개발한 인공지능 archillect(트위터 계정)
Archillect가 찾아낸 이미지

디지털 퍼포먼스

Pak이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어요. 프로젝트의 규모를 볼 때 개인이 아닌 팀일 것으로 추정이 돼요. 그의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가까운 표현은 '디지털 퍼포먼스'라고 생각됩니다. Pak의 예술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한참 고민을 했는데 Pak에 대한 글에서 우연히 본 이 단어는 그야말로 예술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확한 네이밍이었습니다.

Pak는 여느 아티스트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아요. 사진이나 음악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지도 않죠.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보여주기 위해 디지털 이미지와 영상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Pak의 작품 Carbon

대체로 블록체인과 NFT가 만들어가고 있는 디지털 세계의 본질에 관한 것이며, 참여자로 하여금 NFT세계를 체험하고 깨닫게 합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과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입니다. Pak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규모도 방대한데, 3가지 프로젝트 - The Merge, The Fungible, Censored - 를 중심으로 2편으로 나누어 알아볼게요.


The Merge

‘합병’이라는 뜻의 The Merge 프로젝트는 동그라미 이미지 하나가 전부였어요. 프로젝트가 진행된 3일간 무려 28,983명이 이 동그라미를 구매합니다. 대단하죠? 소셜미디어에서 팔로워 3만 명을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돈을 지불한 사람이 3만 명 가까이 되다니. 게다가 3일 만에 말이죠.

동그라미 한 개당 약 30~50만 원으로 누구나 수량 제한 없이 살 수 있었는데요. 총 312,686개의 NFT가 팔리며 3일 만에 9,180만 달러(약 1,080억)를 벌어 들입니다. 현존 NFT 아티스트 중 가장 큰 매출 기록이었으며 역대 수익 합계에서도 1위를 차지합니다. 참고로 이 금액은 2018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생존 화가의 작품 중 가장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예술가의 초상'(1,019억 원) 보다 더 높은 금액이라 할 수 있어요. 정말 입이 떡 벌어지지 않을 수 없네요.  

cryptoart.io/artists


규칙 - 적자생존

자 이제, 벌어진 입을 살포시 다물고 대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았는지 알아볼까요? Merge에는 간단한 규칙이 있어요. 원을 산 개수만큼 원이 합해지면서(merge) 크기가 커집니다. 하나의 원은 하나의 질량인 Mass(이하 m)라고 부르는데, m을 많이 보유할수록 질량이 늘어나 원의 크기가 커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원을 크게 만들고 싶다면? 그냥 더 사면됩니다. 그런데 처음에 동그라미를 10개 구매한 사람이 추가로 더 사고 싶을 수도 있겠죠? 그러면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m의 개수에 추가된 m의 수를 합해 계속 원이 커지며 합병됩니다. 살수록 무한히 합해지는 거죠.

예시) m 10 + m 7 = m 17

Merge의 규칙 / 큰 숫자의 색이 작은 숫자의 색을 지운다

m이 일정 개수에 도달하면 원의 색이 변하게 돼요. m을 더 많이 보유한(질량이 큰) 원이 m의 수가 적은 원을 합병할 경우, 더 큰 질량을 가진 원의 색으로 선택됩니다. m10의 색이 노란색이고 파란색인 m5를 합병했다면 m15는 노란색이 되는 식이죠. 또 많이 구매할수록 '보너스 m'을 추가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쓸수록 더 높은 수의 m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Pak은 '합병'이라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고 관람객들을 먹고 먹히는 생존 게임에 참여시켰어요. 돈이 더 많이 투여된 m이 돈이 적게 투입된 m을 합병해서 작은 m의 속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서바이벌 게임과 다를 바가 없죠. '돈이 없으면 사라질 수 있다'라는 무지막지한 자본주의 힘의 논리를 실감할 수 있어요.

가장 작은 원 1개의 크기 / m(1)


욕망의 크기

크기가 큰 원을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돈을 지불했다는 것이고 희귀도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10억을 지불하는 사람이 30만 원을 지불하는 사람보다 훨씬 적을 테니까요. NFT에서 희귀도는 가치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인데요, 가장 희귀도가 높은 원은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원을 더 크고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적으로 구매했습니다.

12,149개가 합병된 m(12,149)

그렇게 해서 가장 큰 동그라미는 몇 개를 합병했을까요? 무려 12,149 개입니다. 그래서 원의 이름도 ‘m(12149)#1’이죠. 원 하나에 최저가였던 30만 원 정도로 단순 계산하면 한화 30억 원 이상의 자본이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돼요. 물론 정확한 금액은 알 수 없지만 엄청난 금액을 쏟아부은 것은 분명합니다. merge라는 이름의 욕망의 전차는 1만 2천 개가 넘어서야 비로소 멈추었습니다.

가장 큰 m(12149)

이 프로젝트는 [돈을 많이 지불한다 > 희귀도가 높다 > 시장에서 인정받는다 > 더 큰돈을 번다]라는 NFT시장의 생리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어느 투자 수단이나 마찬가지지만 특히 NFT 시장은 큰돈을 보유할수록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철저한 시장논리를 따릅니다. merge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금액을 투자할수록 시장에서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동그라미가 생성돼요. 물론 가장 희귀한 원을 만들었다고 해서 투자금 대비 항상 더 높은 가격으로 팔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리스크가 있죠. 전형적인 '고위험, 고수익(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의 투자시장 논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검은 동그라미가 엄청난 금액을 투입해 탄생한 동그라미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갑자기 뭔가 예뻐 보이고 사랑스럽지 않나요? 누구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최고급 명품 중의 명품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나요? 이미지는 그대로인데 말이죠. 혹시 이 동그라미를 누군가 주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거 받아서 뭐 하게? 나도 그릴 수 있는데"라며 무시할 건가요? 아마 99.9%의 확률로 받겠다고 할 겁니다. 독자 여러분은 이 동그라미가 돈으로 직접 환산될 경우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 심쿵한 상상을 이론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어떤 대상의 본질적 가치는 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그 시장에 참여한 구성원들의 합의와 평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명품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가치가 있는 것처럼 작품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가치가 생기죠. NFT의 가치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건 종이의 양면에 불과해요.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비싼 돈을 주고 사?"와 "어머 이건 사야 해"라는 말은 인식 전환의 문제일 뿐, 우리는 언제든 전자가 수도 있고 후자가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각자가 하는 것이겠죠.

Pak은 시장의 심리를 꿰뚫어 보고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먹고 먹히는 간단하면서도 잔혹한(?) 게임 속에 참여자(구매자)들을 몰아넣고 그들로 하여금 NFT의 가치 생성과정과 시장논리를 체감하게 했어요. 프로젝트를 통해 돈을 버는 것조차 '설계자' Pak에게는 예술활동입니다.


단순화의 대가. "아트는 껍데기일 뿐이야"

NFT아트 시장에서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대중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팬을 만들기 위해 작품들을 창작하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예쁘고 신비롭고 때로는 기괴한 아트들을 보며 컬렉터들은 취향에 따라 구매 버튼을 누르곤 하죠. 그런데 The Merge 에는 동그란 원 하나가 전부입니다. Pak은 단순화의 대가입니다. 형태도 단순할뿐더러 색도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을 말하려는 듯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구성된 경우가 많아요.

The Merge

모양은 단순하지만 Pak의 프로젝트는 과정이 복잡하고 설명도 많아서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이에요. NFT와 블록체인에 대해 모른다면 더 이해하기 어려워서 잠시 설명을 덧붙여 볼게요. 'NFT로 만든다'는 것은 블록체인에 기록을 한다는 뜻인데요. 기록을 암호처럼 조합문자열의 형태로 기록을 하고, 그 문자열을 해시값이라고 불러요. 예를 들어 '3dadapaklike3dsdlol' 이런 식으로 암호처럼 보이는 문자와 숫자 조합의 나열이에요. 모든 NFT들은 모두 다른 해시값으로 기록이 되는데, The Merge의 동그라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Pak은 프로젝트의 이미지를 겉모습을 최대한 단순화시킨 동그라미 형태로 진행했어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모양이기에 디자인 면에서는 아무런 차별점을 가질 수 없죠. 반면 그 동그라미들의 블록체인 해시값은 서로 완전히 달라요. 1만 개의 동그라미 이미지가 있다 해도 블록체인에 각각의 해시값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각자 고유의 가치를 갖기 때문이에요.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른 자아를 갖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블록체인 해시값이 기록되어 NFT가 되는 예시


따라서 어떤 형태의 이미지든 블록체인에 기록되는 순간 블록체인의 속성에 종속되는 셈인데요. 우리가 NFT아트를 구매한다는 것을 매우 단순하게 표현하면, 그 작품이 기록된 블록체인의 문자열 한 줄을 사는 것에 불과해요. Pak은 겉모습을 단순화시켜 이미지에 대한 관념을 배제하고 NFT의 속살을 들여다보라고 주문합니다. 껍데기에 집착하지 말고 NFT와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조금 본질적으로 접근해 보자는 것이죠. 물론 많은 사람들이 실제 Pak의 의도를 고민하면서 구매를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Pak은 이미 거대한 상징자본을 축적한 아티스트였고 그 명성에 따른 무지성 투자수익을 기대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The Fungible - NFT 맞나요?

The Fungible Collection

Pak이 진행한 또 다른 프로젝트 The Fungible은 The Merge보다 수개월 앞서 시작되었어요. NFT(Non Fungible Token / 대체 불가능한 토큰) 프로젝트인데 '대체 가능한 것'이라는 뜻의 'The Fungible'이라는 이름으로 반전을 주었습니다. NFT 하면서 'FT'얘기를 하다니. 뭔가 심상치 않죠? The Fungible은 The Merge 보다 크립토 세계를 훨씬 더 전방위적이고 근본적으로 조명합니다. The Fungible은 경매회사인 소더비와 함께 2021년 4월에 진행되었는데 총 1,700만 달러(한화 약 2백억)의 판매가 이뤄졌습니다.


A Cube – 큐브

The Fungible은 'A Cube'라는 큐브 이미지의 디지털 아트를 판매하면서 시작되었어요. 큐브는 누구나 신용카드로 살 수 있었고 개인마다 총 큐브 발행량 안에서 무제한으로 구매할 수 있는 OPEN EDITION 방식이었습니다. 'A Cube'라는 이름처럼 하나의 큐브는 다른 하나의 큐브로 1:1 대체될 수 있는 동일한 큐브였습니다. 우리가 '도깨비살롱의 이상한 미술관'이라는 책을 산다면 ㄱ서점에서 사든 ㅇ서점에서 사든 정가에 살 수 있는 똑같은 책들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A Cube는 3일 동안 판매되면서 날짜 별로 판매 개수와 가격이 달라졌습니다. 이와 동일한 판매 방식이 The Merge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었는데요, 가장 기본 단위인 큐브로 많은 사람들이 Pak의 게임에 참여하게 됩니다.

- 첫째 날 14,000개 에디션 큐브 : $500

- 둘째 날 4000개 에디션 큐브 : $1,000

- 셋째 날 5000개 에디션 큐브 : $1,500

A Cube


Fungible에서 Non-Fungible로

Fungible 에디션(A Cube)의 판매가 완료된 후, 수집가가 소유한 총 큐브 개수에 따라 NFT가 세트로 제공되었습니다. 아래는 구매한 큐브 개수와 그에 따라 제공되는 NFT의 이름과 예시입니다.

큐브 개수와 제공되는 NFT(왼쪽) / 예시(오른쪽)

예를 들어 1,001개의 큐브를 구매한 사람에게는 ‘Thousand Cubes’라는 이름의 NFT 1개와 A Cube 1개를 주었고, 6개의 큐브를 구매한 사람에게는 ‘A Cube’ 1개와 ‘Five Cubes’ 1개 총 2개의 NFT를 주는 방식입니다. 이처럼 대체 가능한 큐브들이 대체 불가능한 NFT로 치환되었어요. FT에서 NFT로. NFT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The Fungible은 'NFT'가 영국 콜린스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던 2021년에 진행되었어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적절한 타이밍에 콘텐츠를 시장에 내놓으며 달리는 말에 올라탄 것이죠.


Pak 선생님의 가치 방정식

NFT는 다양한 이유들로 가치가 발생하는데요. Pak은 앞에서 소개한 NFT 외에 6개의 특별한 NFT를 발행하면서 NFT의 가치 생산 방정식을 그 다운 심플함으로 소개합니다. 이 6개의 에디션은 옥션과 이벤트를 통해 A Cube의 구매자들 중 특정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는데, 그들을 살펴보면 Pak의 세계관과 NFT의 속성을 대체로 깔끔하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Complexity – 복잡성

Complexity는 총 100개가 발행되었고 오픈에디션에서 가장 많은 큐브를 구매한 상위 100명에게 주어졌습니다. 큐브의 움직임을 보면 처음의 완벽한 큐브는 삐뚤빼뚤 여러 모양과 크기로 나뉘며 복잡해집니다. 하지만 이 분할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기원이 되었던 완전한 큐브로 돌아갑니다.

Complexity

이는 창작자와 수집가의 관계 그리고 창작자의 세계(큐브) 안에서 다양한 수집가들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집가, 즉 소유자들은 실제로 다양한 언어, 국가, 성별, 성격, 나이 등 수많은 변수를 지닌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지니고 있죠. 하지만 이들은 하나의 블록체인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해요. 수집가들은 동일한 NFT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같은 커뮤니티와 세계관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죠. 이 수집가들이 속한 그 우주의 기원은 창작자의 세계관에 있습니다. Complexity는 블록체인의 특성, ‘소유권 증명’이라는 NFT의 역할, 창작자와 소유자의 관계 등 NFT의 핵심 요소를 큐브의 움직임으로 모두 담아낸 매우 뛰어난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The Builder – 설계자/창작자

The Builder는 Pak처럼 NFT의 길을 개척해 온 아티스트, 프로젝트 빌더, 창작자들에게 제공되는 30개 에디션의 NFT입니다. 빌더는 말 그대로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에요. 그 우주는 아티스트가 창조해 낸 멋진 작품일 수도, 훌륭한 수집가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일 수도, 블록체인 기술로 세상에 혁신을 가져오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죠. 우주를 만드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그 세계를 운영하고 관리하고, 발전시키는 것 또한 보통 일이 아니에요. 실력, 명성, 자본, 노력에 운까지 있어야 성공할까 말까 하니까요. 성공 여부를 떠나 시작을 한 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The Builder

큐브 모양을 보면 안쪽이 비어 있네요. 큐브 안의 공간은 빌더가 만들어가는 우주이며, 그 안을 채우는 것은 빌더, 아트, 커뮤니티 등 블록체인으로 연결된 실체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죠. Pak 본인(팀)도 빌더이기 때문에 빌더의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함께 NFT세계를 만들어가는 이들에 대한 존경을 담은 NFT인 것으로 보입니다.


3. The Cube – 큐브

큐브를 가장 많이 산 구매자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단 하나만 발행된 NFT입니다. 가장 많은 돈을 소비한 사람에게 가장 희소성 높은 NFT가 제공된 것입니다. NFT 자본주의 시스템의 '국룰'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인지 오픈에디션에서 누구나 구매할 수 있던 A Cube와는 달리, 유일함을 나타내는 정관사 ‘The’가 붙었습니다. 구매 경쟁을 부추겨 많은 큐브를 사도록 유도하면서 NFT의 희소성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알려줍니다. The Merge의 가치 상승 논리와 매우 유사하죠?

The Cube의 모양을 보면 ‘The Builder’의 큐브(2. The Builder 참고) 안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무한히 형태가 변하는 또 하나의 큐브가 있습니다. 빌더가 창조한 우주 안에서 큐브가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가장 희소성 높은 NFT의 고유한 가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The Cube


4. Equilibrium – 평형

이퀼리브리엄은 아래의 조건을 달성한 사람들에게 각 1개씩, 총 4개가 제공되었습니다. 각 NFT들의 제목과 제공 조건에는 NFT시장의 속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1) The Cryptographer(암호사용자)

Pak이 낸 퍼즐(퀴즈)을 맞춘 사람에게 주어졌어요. 블록체인에 새로운 블록을 생성하는 것은 컴퓨터가 연산식(암호)을 풀어내는 과정인데요. Pak의 퍼즐을 푸는 것은 바로 암호를 풀어내는 블록체인의 속성을 표현한 것이죠. 블록을 생성한 사람이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거래를 검증한 대가로 암호화폐를 보상으로 받듯이 The Cryptographer 또한 퍼즐(암호)을 풀어낸 사람에게 보상으로 제공된 것입니다.

2) The Hunter(사냥꾼)

The Hunter는 Pak의 작품을 2차 시장에서 가장 높은 금액으로 산 사람이 받게 되었습니다. 2차 시장은 NFT 소유자들이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올려 둔(리스팅) 작품들이 거래되는 시장을 말하는데요. 가장 높은 금액으로 작품을 구매한 사람을 '사냥꾼'이라고 표현하며 돈만 있으면 원하는 어떤 작품이든 소유할 수 있는 자본주의 힘의 논리를 연상케 합니다.

3) The Influencer(인플루언서)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처럼 이 NFT는 'PakWasHere(팩이 여기 있었다)'이라는 해시태그를 가장 많이 사용해 퍼뜨린 소셜 미디어 이용자에게 제공되었습니다. 'PakWasHere'라는 해시태그는 Pak의 또 다른 NFT프로젝트인 'Censored'에서 Pak 스스로 민팅한 작품의 제목으로 Pak을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인플루언서들은 NFT시장에서 굉장히 많이 활동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으로 2,400만 명에 가까운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로건 폴(Logan Paul)을 들 수 있어요. 그는 NFT에 큰돈을 투자하기도 했고, 스스로 NFT 프로젝트를 런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로 활동하며 팔로워들에게 NFT를 소개하거나 직접 투자하면서 NFT시장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죠.

4) The Oracle(신탁)

경매 시작 전, 전체 컬렉션의 총판매량을 가장 가깝게 추정한 사람에게 이 작품을 선사했습니다. 신탁이란 신이 사람을 매개로 그 뜻을 나타내는 일을 말합니다. 주술, 예언 같은 느낌으로 흥미로운 제목과 재미있는 콘셉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추정만 잘하면(운이 좋으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돈을 많이 쓰지 않아도 운 좋게 높은 가치의 NFT를 얻는 행운을 얻기도 해요. 어떤 분야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운은 무시할 수 없죠.  

Equilibrium

이처럼 네 가지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NFT시장에 참여하는 주요 수집가들의 모습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수집가들이 각자의 역량과 가치관에 따라 빌더와 소통을 하고 커뮤니티를 구성합니다. 그것이 바로 The Builder와 같은 모양(2.The Builder 모양 참고)의 큐브 안에 완전한 구체가 은유하는 바입니다. 창작자의 우주 안에서 창작자의 세계에 공감하고 그 일부가 된 수집가와 커뮤니티 전체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빌더(창작자)의 공간 안에서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창작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들입니다.


5. The Switch Proxy – 스위치

스위치는 디지털 세계에서 NFT아트의 진화를 보여주며, 한 번만 사용할 수 있고 효과는 영구적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한 번 기록이 되면 지워지거나 변형되지 않습니다. 블록이 일단 시작되면 다음 블록이 추가 생성되어 쌓이기만 할 뿐 뒤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The Switch Proxy

스위치라는 말처럼 다음 블록으로 '전환'이 될 뿐입니다. 주민등록번호를 일단 받으면 다른 주민등록번호로 대체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The Builder와 같은 모양(2.The Builder 모양 참고)의 빈 큐브 안에 다른 큐브 덩어리가 안에 들어가 있는데, 이 둘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여도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영원히 같이 있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빌더가 어떤 세계, 즉 블록을 생성하기 시작하면 그 블록체인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됨을 The Switch Proxy의 움직임이 암시합니다.


6. The Pixel – 픽셀

회색의 정사각형입니다. 이 정사각형 픽셀은 모든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입니다. 단순한 형태이지만 NFT아트의 기원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픽셀 NFT는 1개만 발행되었고 경매에서 1,355,555달러(한화 약 16억 7천만 원)에 낙찰되었습니다. 회색 네모 이미지든 동그라미든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공감한다면 무엇이든 가치를 가질 수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그저 JPEG파일이겠지만 그 의미를 아는 누군가에게는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 보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면 메시가 신었던 축구화를 예로 들어 볼까요? 메시의 축구화는 지난 2021년 자선 경매를 통해 한화 2억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되었습니다. 매장에 예쁘게 진열된 새 축구화보다 훨씬 낡았을 텐데 말이죠. 하지만 그 축구화에는 '메시가 신고 뛴 역사'가 담겨 있으며, 그의 업적을 함께 쌓아간 노고와 땀이 깊이 서려 있을 겁니다. 새 신발보다 수백 배 높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은 당연하겠죠? 축구화를 소유하는 순간 세계적인 슈퍼스타의 역사적 상징물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는 거니까요. 이외에도 유사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The Pixel

이 경매에는 대형 수집가인 'Eric Young'과 역시 수집가이자 사업가인 '33NFT'가 끝까지 경합했습니다. 그 결과 Eric Young에게 최종 낙찰됩니다. 입찰 과정을 지켜보며 흥미진진한 베팅에 재미를 느낄 수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이 경매 과정 자체가, 그것을 지켜보는 모두에게 NFT아트의 역사를 축하하는 축제의 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자신의 저서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예술의 '제의가치(종교적, 의식적 가치)'의 개념을 주창했는데, 결은 다르지만 이 픽셀 경매는 역사의 기원을 구성원들이 함께 기념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제의적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합니다. NFT아트의 역사가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희망을 담은 것이지요. 동시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역시 크립토 아트의 발걸음에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작고 작은 관심들은 때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고, 길이 없던 곳에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The Pixel 경매 낙찰 과정

이처럼 The Fungible과 The Merge는 심플한 이미지와 영상들 속에 블록체인과 NFT 철학을 촘촘히 새겨 넣은 프로젝트들로 Pak의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화려함을 찾아볼 없는 담백함 속에서도 묵직한 사색의 깊이를 느끼며 예술의 향기에 취해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대중적으로 외면받기 쉬운 어려운 주제임에도 커다란 인기와 자본을 끌고 오는 엄청난 스타성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차별화 지점입니다. 달라이 라마철학 다큐멘터리가 할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를 제치고 1위를 한 느낌이랄까요?

The Merge와 The Fungible이 예술 철학자로서 Pak의 면모를 드러낸 순수 디지털 퍼포먼스였다면, 이번에는 현실의 이슈를 알리고 해결하기 위해 블록체인을 활용한 또 다른 Pak의 프로젝트, Censored를 소개합니다.

(..다음 편에 이어서)



• 트위터  https://twitter.com/muratpak

• The Merge 컬렉션

https://www.niftygateway.com/marketplace/collectible/0xc3f8a0f5841abff777d3eefa5047e8d413a1c9ab

• The Fungible 컬렉션  https://www.niftygateway.com/collections/paksothebysauction

• Superare 컬렉션  https://superrare.com/pak

• Niftygateway 컬렉션  https://www.niftygateway.com/collections/pak 

• Pak이 개발한 인공지능  https://twitter.com/archill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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