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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29. 2023

안녕, 2023년. 어서 와, 2024년.

특별했던 나의 2023년을 떠나보내며

늘 한 해가 마무리될 때면 한 거 없이 시간 빨리 지나갔네, 계획한 거 제대로 못 이뤘네 하면서 아쉬움만 가득했다. 특별한 마흔을 보낼 거야라고 외쳤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아쉬움 가득한 마흔을 보내고 맞이한 23년의 마흔한 살. 뭔가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똑같겠다 생각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해의 계획을 세웠다. 몇 킬로 감량, 포트폴리오 몇 장 만들기 등등 매해 세웠던 같은 계획들 가운데 다른 하나가 있었으니 아이학교의 어머니 반대표 되기였다. 지난 22년 아이가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무리 지어 노는 것보다 한 친구와 노는 것이 편했던 아이는 그 한 명의 친구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별것 아닌 말로. 그저 본인의 뜻대로 해주지 않으면 "너랑 친구 안 해, 너랑 절교야, 나 전학 가버린다" 등등 사실 내입장에서는 정말 왜 속상해야 할지 모르는 말들로 아이는 마음 아파했고 나는 답답한 마음에 화를 더 많이 냈다.

"그런 친구 전학 가면 어때, 그리고 전학이 혼자 마음대로 되는 거니? 왜 그런 걸로 울고 그래?" 엄한 딸만 나무랐다. 그 친구 때문에 억울하게 선생님께 혼났다 해도, 학교에서 놀친구가 없다 해도 그런 일을 겪으며 강해지리라 생각하고 일체 학교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핸드폰을 개통해 준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학교 갔다 집에 온 아이가 사건을 이야기해 줬다. 단톡이 만들어졌는데 본인이 만든 게 아니고 다른 애가 초대했는데 우리 가족 휴가 기간이어서 그냥 나왔었다고. 그런데 그 단톡 만들어진 게 그 친구 험담을 하기 위한 단톡이었다고 누가 일러서 선생님께 야단맞았다고. 억울하게도 그 단톡 만든 사람이 우리 애라고 처음에 지목받고 혼이 났다는 것이다. 핸드폰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는 일을 왜 아이가 혼이 난 건지 선생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참았다. 선생님과 부딪혀서 좋을 일 없다 생각했다. 그저 아이에게 속상했겠다 위로해 주고 단톡 초대받아도 절대 들어가지 말라 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아이 엄마가 학교에 왔다고 했다. 친구와 자기를 데리고 가서 단톡을 누가 만든 건지 왜 만든 건지 질문했다고 한다. 내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인내심을 무너뜨리는 한마디. "엄마, 그런데 그 엄마가 핸드폰으로 녹음하고 있었어."


지금 다시 쓰면서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단톡을 만들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 단톡방에서는 단 한마디도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학교에서 발생하는 아이들의 문제는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에게 직접 접촉을 하고 핸드폰 녹음까지 한다는 것은 내 상식밖의 일이었다. 그. 래. 도 참고 선생님께 상담드려야겠다 생각했다. 때마침 상담기간이기도 해서 방문상담을 신청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날, 기다리지 못하게 됐다. "엄마, 그 친구 아빠가 나한테 와서 단톡 만들지 마라고 그랬어."

영화 인사이드 아웃 버럭이 참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자영업 하는 걸 알았기에 가게로 전화를 했다. 폰이랑 연결해 두었는지 상담 중이라고 문자가 왔고 나는 아이의 억울함과 어른이 직접 접촉하는 건 아닌 거 같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전화가 왔다. "만나서 이야기해요.""네 내일 어디서 몇 시에 만나요." 분쟁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사과하고 오해가 있으면 풀기 위해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다시 문자가 왔다. "만남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코로나에 걸렸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이방에 홀로 격리된 채 나름의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문자가 왔다. 본인의 아이가 피해자고 내가 화낼 입장은 아니라고. 같은 일이 생기면 똑같이 대처할 거고 우리 아이를 본인 아이에게 접근금지시키고 나랑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문자였다. 마음 같아서는 코로나고 뭐고 만나서 머리끄덩이 잡고 싶었지만 남편이 똑같은 사람 되지 말자며 아무렇지 않게 답장을 썼다.

"부모에게는 모두 자기 자식이 피해자입니다. 또 한 번 직접적인 접촉이 있으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끼리의 접촉은 선생님께 말씀드리세요. 우리가 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기와 비슷한 내용으로 씀)그리고 차단했다.


그 후 나에게 연락을 했던 것인지 차단해서 모르고 있었지만 그 엄마 친한 다른 애 엄마가 뜬금없이 나와 통화하고 싶어 한다고 담임선생님께 들었다. 선생님께 상황에 대해 설명드리고 연락받기를 거절했다. 그 일을 계기로 아이도 한층 강해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감사할 일일지도 모르겠다.


서두가 길었지만 그 일 이후 꼭 학교에 가봐야겠다 생각했다. 학부모임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엄마들을 만나고 나름의 내편을 만들자 생각했다. 코로나가 완화되고 오프라인 총회가 처음 열렸다. 총회에 참여했더니 아이의 어머니 반대표가 되 3학년장이 되었다. 학부모회의에 참여하고 임원들과 친해졌다. 커피 한잔을 나눌 동네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연고가 없는 이곳으로 이사와 집에서 그림만 그리던 나는 주변에 친한 언니 딱 한 명 있었는데 그 언니마저 이사를 가서 만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한 언니가 몇 명씩 생기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학교 행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즐거웠다.

학부모 연수로 페이스페인팅 수업이 있었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그곳에서 처음 봤던 임원 언니들이 그 주에 있을 예정이었던 페이스페인팅 행사에 반강제로(?) 투입시켰다. 집이 아닌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종일 그림을 그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엔도르핀과 도파민이 마구 생성되고 있었다. 다른 곳에도 참여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에 동화구연자격증 연수가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고민도 없이 신청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목소리도 작고 연기는 아예 못하는 나다. 무슨 용기로 그렇게 신청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 또한 잘했노라 그때의 나를 칭찬한다. 연수기간을 거쳐 자격증을 따고 남은 사람끼리 팀을 짜서 두 번의 공연을 했다. 운 좋게도 다 좋은 사람들이다. 모나지 않게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해내고 즐기며 웃음꽃이 가득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거기에 또 용기를 얻어 브런치 프로젝트를 신청했고 지금의 2기 동기분들과의 인연이 생겼다.


아이를 위해 내디딘 한 발이 결국 나를 위한 길로 인도했다. 학부모회 참여도, 동화구연도, 브런치 프로젝트도 아이를 위한 인맥 쌓기가 아닌 나를 위한 만남들이 되었다. 일주일에 외출 한번 겨우 할까 말까였던 내 삶에 일주일 한번 집에 있을까 말까 한 바쁨이 주어졌다. 그동안 아쉬움만 가득했던 연말이 알차게 보냈던 한 해였다며 내년을 기대하는 연말이 되었다. 올해라고 아이가 속상하지 않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 스스로도 자기가 그 일로 강해졌다 얘기할 만큼 내성이 생긴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소소한 일로 속상해하곤 한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아이와 나에게 상처받는 일이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또 강해질 것이고 올해처럼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버라이어티 한 일들이 가득할 수 도 있다. 2024년은 상처는 조금, 즐거운 일들은 한가득 담기길 기대해 본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한 해가 끝날 때

그 해의 처음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느낄 때이다.

–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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