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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ly May 04. 2024

별 볼 일 있는 섬 청산도

2022년 청산도 느리게 걷기 축제 참여후기

장거리 운전이 꺼려지긴 했지만 섬에 내려서 숙소나 전시 현장까지 이동이 만만찮을 거라는 판단에 결국 차를 가지고 내려가기로 했다. 완도 선착장에서 간신히 청산도행 막배를 탈 때만 해도 시작이 좋다는 흐뭇한 안도감이 몰려왔고, 선실 온돌에 누워 새벽부터 달려 내려온 고단함을 달랬지만 한 시간 남짓의 항해가 끝나고 선착장에 내리자 주변에 문이 열려있는 식당은 단 한 곳도 없었다. 부둣가 맛집들의 향연 속을 거닐며 뭘 먹을지 기분 좋은 고민을 하리라는 상상을 하던 우리를 길고양이들이 가엽게 바라보는 듯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나그네를 반겨주지않나 보다.

완도에서 청산도로 가는 페리에서 섣부른 안심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딱 한 군데 열려있는 활어 공판장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 생선회를 싸들고 청산도의 첫 밤을 보내러 숙소로 향했다. 밤부터 바람이 거세졌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차 문이 잘 안 열릴 정도였고 답사차 돌아본 바닷가에는 험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그래도 며칠 여유를 두고 입도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섬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청산도는 작고 아늑했다. 서편제에서 노래패 셋이 어깨춤을 들썩이며 걷던 그 길에 유채꽃이 가득했고 관광객들은 포토존에서 행복한 추억을 남기고 있었다. 역사유적도 다양하고 어업이 흥하던 날들의 자취도 항구 뒷골목에 아직 남아있어서 산책길을 흥미롭게 해 주기도 했다. 

안갯속의 유채밭과 구들장 논

작품을 설치할 현장까지는 차로 들어갈 수 없어서 수레에 짐을 싣고 둘레길을 걸었는데 짙은 숲의 향기가 강렬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둘레길 초입에서 도보로 20분 정도의 모퉁이였는데 소나무 수십 그루가 빼곡히 모여서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듯했다. 현지 관계자의 귀띔을 명심하여 뱀에 물리지 않도록 목이 긴 장화를 챙겨 신었다. 소나무숲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바로 보였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바다로 내려갔다. 지난밤의 거센 바람과 파도는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아직 그 기세가 대단했다. 우리는 고고학자들처럼 긴 해변을 따라 탐색에 나섰다. 모래는 거의 없는 몽돌해변이라 걷기가 수월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오브제를 만날 생각에 기대감이 커져갔다. 나는 몇 해 전 제주 우도해변에서 열린 '우도락'페스티벌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악기 대신에 공연날 아침 바닷가에서 마주친 빈 프로판가스통, 유리병, 유목 등을 타악기 삼아 연주했다. 바다와 환경이 점점 쓰레기로 뒤덮이는 현실의 위기를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청산도에서도 소나무밭 설치작품 안에서 바다 쓰레기 연주를 하고 싶었다. 


함께 참여한 작가 S 씨가 탐색 10분도 되지 않아 고함을 쳤다. 이것 좀 보라고 야단을 쳐서 달려갔더니 조그만 말미잘 같이 생긴 살색 덩어리가 돌틈에 버려져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남성용 자위기구였다. 아마도 뱃사람들이 바다에 버려서 이 섬까지 떠내려온 것일 테지. 해안에 떠내려온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일본산 페트병과 유리병, 과자봉지, 온갖 스티로폼 어구와 플라스틱 부표들, 윤활유 말통 등등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해양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우도에 비하면 교향악단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 악기(?)들은 풍부하고 다양했다. 이번 청산도 소리 퍼포먼스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 바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수집한 쓰레기 악기들을 낑낑대며 계단 위로 짊어져 올라갔다. 이제 바다와 섬의 신을 만날 차례다. 


'만선'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넉넉한 기분이 든다. 어창에 보물들을 그득 싣고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어선들에는 형형색색의 '만선기'가 달린다. 부두에서 기다리는 여인들이 멀리서 그 휘황하게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 며칠 만에 재회하는 남편이나 아들의 무사한 귀항과 만족스러운 조과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기운과 상징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솔숲에 재현하고 싶었다. 준비해 온 다섯색깔 천들을 나무에 휘감았다. 다행히 뱀은 나타나지 않았다. 뭍에서 건너온 우리 선무당패(?)의 갸륵한 정성에 용왕과 산신님께서 특별히 보호해 주셨을 것임에 틀림없다. 

영원한 만선을 기원하며

성가신 호객행위도,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도, 늦도록 흥청대는 주점도 없었지만 느리게 걷는 섬 청산도에서의 1주일을 뒤로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긴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 우리 둘의 가슴에 즐거웠던 휴양지의 추억만이 남은 건 아니었다. 우리가 두들기고 문질렀던 바다 쓰레기의 소리가 이 세상을 바꿔놓지는 못할 거다. 절대로. 이미 늦은 건지도 모르지만, 외면하고 망각해서는 안될 거대한 먹구름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느린, 별 볼일 있는 섬 청산도에서의 기억은 아직도 묘하게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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