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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하는작자 Sep 19. 2022

상추 한 접시

수백 번의 망치질 끝에



대야에서 갓 찬물 샤워를 마친 파릇한 상추를 소쿠리 가득 담아 밥상에 올리면 무채색 밥상이 생기 발랄해진다. 누구는 꽃이 피기 전까지 화수분처럼 계속 자라다 보니 처치 곤란한 채소라 하고, 고기나 강된장 옆에서 그저 곁들이는 존재라고 하지만 나는 상추를 무척 좋아한다.

        

밑그림을 그리지만 손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하는 편


처음 시집가서 아무것도 할 줄 몰라 그날도 어머니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데 밭에 가서 상추 좀 뜯어오라며 플라스틱 소쿠리를 주셨다. 먹어보기만 했지, 상추가 어떻게 자라는지 단 한 번 본적도, 아니 관심조차도 없던 나는 상추같이 생긴 여러 초록 식물들을 지나 하우스 제일 안쪽에 상추로 보이는 작물 앞에 쪼그려 앉아 층층이 나있는 잎 중에 크기가 적당한 잎들을 골라 뜯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상추는 제일 밑에 있는 겉잎을 뜯어내고 그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뜯는 거라고. 그래야 계속해서 수확할 수 있는 거라고.



한참 걸려 모은 상추를 어머님이 샘이라 부르는 그곳에 앉아 흐르는 물에 한 장 한 장 씻은 다음 물기를 탁탁 털고 상에 올리면 들인 노력에 비해 상차림이 대번 풍성해졌다.

상추 수확하는 일은 이제 막 며느리 타이틀을 단 나에게 최고의 일거리였다.  


돌돌 말린 톱밥 생산은 카빙에서 가장 즐거운 과정


상추는 사람을 불러 모은다. 고기 요리 곁들임으로 대체 불가하기에 상추가 오르는 날은 곧 고기를 구워 먹는 날이었다.

외식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았던 어린 시절엔 고기를 먹는 날이면 모두가 분주했다. 옆집 작은 화단에 뿌리를 내린 감나무가 우리 빨간 벽돌집 담을 비집고 2층에 있는 평상까지 드문드문 그늘을 내어주던 그곳이 우리 가족의 외식장소였다. 아빠는 평상 위 누런 장판에 쌓인 먼지를 걸레로 훔쳐내고, 오빠와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빠가 펴둔 신문지 위로 음식을 날랐다. 상추까지 소박한 밥상이 차려지면 할머니와 할아버지까지 우리 여섯 식구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바람에 감나무 잎이 펄럭이면 고소하게 익어가는 고기 냄새가 좁은 골목길에 흩어지고, 검정 봉지에 고기가 얼마나 남았는지, 이번 쌈에는 밥을 넣을지 말지, 된장찌개는 언제 먹을까 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넘실 담을 넘었다.


물빠짐이 용이하도록 앙증맞은 다리를 달아주었다


음식에 대한 기억은 오래될수록 맛보다 점점이 박혀 있은 장면으로 남는다.

낯선 시댁에서 잔뜩 긴장한 숨을 털썩 내뱉었던 상추 밭이, 상추를 씻으시던 그립고 보고 싶은 할머니 주름진 손이 떠오르는 것처럼.



이웃집에서 텃밭에 상추가 많다며 나누어 주셨다.

오늘 저녁엔 어떤 이들과 함께 어떤 보통의 이야기가 소복이 담길까.






그동안은 주로 수입 건조목을 써왔는데 목재 가격 상승이 발단이 되어 국산목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가지 구입한 것들 중에서 결이 맘에 들었던 살구나무. 뒷면에 크랙이 있어 조금 저렴한 가격에 올라와 있었는데, (무슨 심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난 흠이 있는 것에 끌리는 편이다) 실제로 받아보니 생각보다 크랙 면적이 넓고 깊었다. 잘 살려 독특하게 마감하겠다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임무를 부여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결과는 뭐...

나무 위키에서 살구나무는 다루기 쉽다고 분명히 쓰여있었는데 말도 안 되게 단단했다. 월넛보다 더 단단하고, 유독 작업이 어려웠던 체리목과 비슷한 강도였다. 선 자세로 어깨 힘을 모아 밀어내도 끌질이 쉽지 않아 고무망치로 내리치기를 반복해 손가락 한마디 정도 깊이를 겨우겨우 덜어냈다.


망치로 내려치면 손끝까지 찌릿찌릿 하다

그런데 역시 크랙이 문제였다. 심재 부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어딘가에서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미 늦었다. 그 틈으로 끌이 걸려 작업 불가, 목재가 분리되기 일보 직전. 선택은 하나였다. 과감하게 뜯어내고 그 모양대로 살리는 것. 에라 모르겠다. 뜯어내버리자 뜨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이것 또한 값진 경험이라 생각하자며 두 번째 한숨은 목구멍 뒤로 넘겨버렸다. 다시 끌질을 시작했다. 여름을 보내기 아쉬운 듯 개구리는 목청껏 울어대고 성격 급한 풀벌레도 질세라 지르르 지르르.

수백 번의 망치질로 손은 전기가 통하듯 찌릿하고 가슴골로 타고 땀줄기는 계속 흘러 내려갔다.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고 미련하게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며, 내 고집이 기쁨을 집어삼켜버릴까 두려웠다.

내가 깎아낸 만큼 정직하게 직선에서 곡선으로 점점 다듬어져 갔다. 비록 처음 생각했던 생김새는 아니지만 용도에 가까운 형태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좀 더 짙은 흑색을 얻기 위해 케브라초 가루를 물에 녹여 발라준다


숨겨있다 드러난 결이 참 고와서 가볍게 오일 마감만 할까 고민했지만 식재료(특히 상추)가 돋보일 수 있도록 에보 나이징으로 검게 옷을 입혔다.

에보나이징 이후 부처블락 오일을 칠해주면 물이 또르르 맺힌다

지난번 피나무보다 살구나무에 탄닌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인지 확실히 깊은 흑색으로 표현되고 칠하기 전보다 칠하고 난 후 강도도 높아진 느낌이다. 어디까지나 내 느낌.

처음 다뤄본 살구나무는 생각보다 어려웠고 생각

이상으로 색감과 결이 예뻤다. 면적이 넓고 단순한 형태라면 특유의 매력을 뽐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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