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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하는작자 May 25. 2023

반반 접시

새 작업실을 소개합니다


살구색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타일 외벽에 크지 않은 네모 반듯한 단층짜리 건물.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패널 벽으로 반을 나눠 왼쪽은 자동차 배터리 할인점, 오른쪽은 간판도 없이 작은 창문 두 개와 철문 하나 있는 이곳이 내가 새로 구한 작업실이다.


작년 남편 발령으로 어쩔 수 없이 뾰족 지붕 나무 작업실을 떠나보내야만 했고 시간을 내어 왕복 800킬로 거리를 여러 번 오가며 작업실 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처지라 도시 임대료는 이미 내 적정선을 넘어섰고, 외곽으로 나가자니 둥둥이를 데리고 출퇴근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다. 무너져 가는 창고도 좋으니 연락을 부탁했던 부동산들은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이런 매물엔 단 한 통의 전화도 주지 않았다.

직접 손품 발품을 파는 수밖에.


조급한 마음이 포기로 돌아설 때쯤 이사 갈 동네를 걸어가다 ‘임대구함’이란 선명한 네 글자, 하지만 언제부터 걸려있었는지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해질 대로 해진 현수막을 발견했다. 난 급하게 올라가야 해서 내부를 보지 못하고 나중에 남편이 찍어서 보내준 동영상으로 볼 수 있었는데 “이거야 이거! 딱 내가 찾던 곳이라고!” 보자마자 흥분하며 떠들어댔다. 하지만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 “여보가 맘에 든다면 상관없는데, 여기 진짜 괜찮아?”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낡은 건물에 어떤 용도로 사용했던 건지 모를 짐들은 곳곳에 널려있고 해가 들지 않아 침침하고 쾌쾌한 지하실 냄새가 날 법한 공간이었으니까. 무엇보다 현수막 상태만 보더라도 오랫동안 임대가 되지 않은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다.

난 끌리듯이 계약을 했고 그로부터 몇 달 뒤 부모님도 구경하러 오셨는데 네가 손 볼 곳이 많겠다며 걱정 섞인 한마디만 하셨을 뿐 이런저런 말씀이 없으셨다. 아마 엄마 동네에 있는 그 목공방처럼 간판이 내걸린 버젓한 공방을 기대하셨던 것 같다.


참 재밌는 건 타인이 우려했던 요소들이 나를 더 이곳으로 이끌리게 했다는 것


첫째, 나는 남향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환히 비추는 빛보다 늦은 오후 무렵부터 뉘어질 때 내뿜는 노란빛을 더 좋아한다. 서향에는 밝고 어두운 경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반면 모든 것이 뚜렷하지 않고 오히려 희미하게 흐려진다. 선명함이 흐릿해지는 순간엔 내 온몸에 곤두서있던 것들이 호박죽처럼 뭉근해진다.


둘째, 회색 방화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발 앞에 일자로 쭉 뻗은 계단이 나온다. 난간도 없이 제법 가파른 콘크리트 계단이 생뚱맞게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게 어색하고 궁금해서 맘에 들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남편이 보내준 동영상을 여러 번 되감아 보며 계단 끝 너머를 상상하곤 했었다.

터널 밖을 빠져나가듯 컴컴한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옥상에서 햇볕이 한껏 쏟아져 나온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깨진 술병 유리조각이 나뒹굴고 방수 페인트도 모두 벗겨져 민낯을 드러낸 옥상이지만 그 위에 서서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리는 차들을 보는 게 좋다. 오후에 몸이 늘어질 때쯤 햇볕 쬐러 오르면 둥둥이는 목줄 없이 자유롭게 좁은 곳을 뱅글뱅글 뛰어다닌다.


셋째,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유일한 문제는 소음이었다. 내가 만들어내는 작업실 안의 소음과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구조였다. 샌드위치 패널 벽이라 방음을 걱정하긴 했지만 옆 가게에서 하는 말소리까지도 생생하게 들려서 하마터면 대답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작업실 마련에 체력과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계획은 무산되고 몇 주간 직접 방음 공사에 매달렸다.


투바이 다루끼, 틈새는 모두 실리콘 처리
비닐 시공


몸에서 이상신호를 주는데도 미련하리만큼 악착같이 버둥거린 결과 공사기간 그 몇 배의 시간 동안 몸을 회복하는 데 시간을 버려야 했다. 그렇게 찾아온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꼼짝없이 침대 위에서 희생된 기회비용을 기리며 괴로워했다.


충진재 시공
석고보드 1p
합판으로 마감


애써 만든 방음벽은 노력한 거에 비해 효과가 좋지 않았다. 올빼미처럼 밤에 나가기도 하고 웬만하면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 뭐 결과적으론 수공구 위주의 작업 방식을 지켜가기에 더 적합한 환경이 아니겠냐며 없던 긍정 에너지를 꺼내줬으니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넷째, 이전 작업실에서는 자연을 곁에 두어서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면, 지금 작업실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밖 소음으로 일정한 시간 흐름을 알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큰 도로에서 출퇴근 시간 즈음 돼서 올라가는 데시벨이나, 하교 시간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고등학생들 목소리에 불현듯 시계를 쳐다보곤 한다. 6시가 되어 집으로 가는 길에는 구청에서 퇴근하는 직장인들과 섞여 하루를 끝낸 바쁜 직장인처럼 걸음을 서둘러 집으로 향하곤 한다.

느린 걸음으로 15분 정도면 집에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골목이 여러 갈래라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경로를 길게 또는 짧게 걸으며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날을 보내려고 한다.


내가 어찌하지 않아도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테지만 새로운 이곳의 하루치 양만큼 그곳에 두고 온 그리움이 지워질 테니까. 익숙함이 그리울수록 더 꾹꾹 눌러 걷는다. 오늘도 작업실로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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