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시간 운용법
미디어 호더들이 가득한 타임라인 사이에 갑자기 튀어나온 책 제목이 하나 있었다.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그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개인의 OTT 플랫폼 이용률이 치솟았고, 사람들의 감상법에도 변주가 많아졌다. 제목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리는 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놨을지, 읽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현재 E-Book 서비스는 하지 않아 직접 도서를 주문했다. 저자가 일본인이라 한국 상황에 100% 부합한다고 보긴 뭐하다. 그래도 2020년대 현대인의 감상 습성을 관통하는 관찰력과 트렌드 분석을 누구보다 빨리 담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는 책이라고 본다.
저자는 현대인의 빨리 감기 감상법의 원인을 여럿 꼽았다. 바쁜 일상 중 가성비를 따지게 되는 풍조, 영상 콘텐츠의 공급 과다, SNS상 쉼 없이 이어지는 인간관계에 스며들기 위한 학습 목적 등. 등장하는 원인들 모두 깊이 공감하는 바였고, 그중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기껏 시간 내서 한 콘텐츠를 선택했는데, 그마저도 혹시 실패할까 봐 시식하는 개념으로 빨리 감기를 한다는 뜻이었다.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줏대와 취향을 지키기란 참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재미없고 괴랄한 영화를 보고 욕하는 게 취미인 사람도 있다는 건 모르겠지.
'가성비'라는 말을 요 몇 년 새에 참 많이 들었다. 먹고 입고 보는 것들 중에 양산형이 많아서 그런지, 이젠 들인 재화 대비 쓸모를 사사건건 따지고 든다. 콘텐츠를 감상할 때도 가성비는 빠질 수 없다. 누군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남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 후루룩 속독하듯이 빨리 감기를 한다지. 그러나 상반되는 감상법도 존재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볼 때에 빨리 감기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후자는 다양한 콘텐츠에는 관심이 없다.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자극이 부담스럽고, 실패가 염려스러워서, 이미 재밌게 본 검증된 콘텐츠를 다시 느끼는 데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시간이 아까운 건 똑같은데 아끼는 방식이 다르다. 당신의 시간은 여러 가지를 많이 보는 데에서 절약했다고 느끼는가? 혹은 검증된 것을 보다 깊이 음미할 때 더 절약했다고 보는가?
가성비, 가심비, 시간, 재화를 대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천차만별이다. 나는 이제 뭐가 가성비 있다는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군가는 한 콘텐츠만 주야장천 물고 빤다면 1개월 구독료를 아까워할 것이고, 누군가는 쓰레기 작품만 골라 보는 데에 구독료를 허비한 것을 아까워할 것이다. 빨리 감기 버튼이 생겼다 뿐이지 각자 마음껏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누군가는 이미 봤던 작품을 덕질하기 위해서 느린 배속으로 캐릭터의 방과 물건을 샅샅이 훑어보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한창 공부 중인 외국어 리스닝에 익숙해지기 위해 배속을 조절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저 감상법 선택지가 늘어났을 뿐인 것 같다.
꼭 OTT 플랫폼 때문이 아니더라도 밀레니얼 이후 세대는 배속 재생에 익숙한 편이다. 이 땅에 인터넷 강의가 활성화된 지도 거의 20여 년이 다 되어가는데, 수험생에겐 시간이 생명이다. 나는 학생 때 1.8배속으로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 능력을 터득했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 쓰는 데에 익숙한 학생들이 다른 콘텐츠를 감상할 때 정상 배속을 견딜 수 있을까? 적어도 1.2배 이상은 되어야 속이 시원할 것이다. 시간 낭비를 지적하는 풍토는 이미 10대 때부터 듣는 잔소리이다. 영화를 볼 때도 적용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뭐든 빨리 빨리 해치워야 직성에 풀리는 사회 분위기 속에선 더할 거고.
나의 경우 영화는 배속으로 감상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예능은 필요에 의해서만 1.2배속으로 감상한다. 집중해서 감상하는 게 아닌 백색소음으로 둘 때는 정상 배속으로 듣는 게 귀가 편하다. 1.2배 이상으로 넘어가 본 적은 없다. 기본적으로 나는 콘텐츠의 속도까지 연출자가 의도한 호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배속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다고 배속 감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리뷰를 빨리 써야 하거나 2회 차 감상을 위해서는 1.2배를 할 때도 있고, 영상 검수 일을 할 때는 1.5배속이 기본이었다. 목적성 감상에는 시간 절약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도 나는 1.5배속으로 첫 재생한 것은 '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확인한 것일 뿐이다.
OTT 플랫폼 내에 배속 기능이 있다는 건 넷플릭스가 진출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본격적으로 활용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채널 방송으로 본방을 챙겨보는 게 익숙하고,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게 익숙할 때에는 콘텐츠를 주는 대로 보지 않고 가암히 배속을 조절해도 되는지 눈치가 보였다. 그런데 이딴 거에 죄책감을 느끼는 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지인의 어머니는 드라마를 무조건 1.5배속으로 본다고 하시더라고. 그때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 기능을 뭔가를 찾는 데에 쓰지 않고 순수 감상 내내 적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들은 거였다. 그 이후부터 나도 1.2배 재생을 한 번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건 사람과 환경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배속 재생을 거리낌 없이 하는 걸 보면, 내 시간도 갑자기 아까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배속 감상은 충분히 보편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혹은 이 포스팅을 보고 나서부터 배속 감상을 시작하는 이도 생길 것이다. 평소엔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급하게 정주행할 때는 분명 배속 기능의 필요를 느끼고 말 것이다. 슬픈 전염성이다. 학생... 시간 많아? 그래... 아껴 써... 모두에게 주어진 건 똑같지만 내가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지지고 볶고 싶은 게 시간이니까. 시간을 아껴 쓰고 싶다는데 나무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아껴 쓰느라 얼렁뚱땅 훑은 걸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더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개인 양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 위안되는 게 있다면, 저자는 시점을 비틀어 마지막으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외국 영화를 자막으로 감상하는 것도 온전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극장 시설을 뒤로하고 집에서 미흡한 스크린과 음향 시설로 본 것도 제대로 감상했다 할 수 있을지. 음악을 현장이 아닌 레코드에 담고, CD에 담고, MP3에 담아 다니던 것도 감상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지.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어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콘텐츠의 본질이 뭔지 근본부터 고민하게 된다고. 갑자기 내가 영화 꼰대가 된 기분이 들었다.
꼭 주어진 속도대로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주어진 순서가 아니라 보고 싶은 장면만 마음대로 골라서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은 얼마든지 마음대로 읽으면서, 왜 영상물에만 엣헴거리냐 그러면 할 말이 없다. 언젠가는 배속 감상에 대해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것도 코웃음 치면서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감상 소신은 지키되 남의 방식에 말을 얹지 않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도 급하면 배속 재생을 할 거고, 재미없으면 10초 넘기기를 할 수 있다. 기능을 사용할 자유가 있는 거지 비난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자와자와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영화를 꽤 많이 보기는 하는 모양이다. 콘텐츠와 창구의 풀이 넓어짐에 따른 진통이라고 생각해야겠다. 볼 게 너무 많아서 배속 재생한다는데 어쩌겠어요? 재밌는 거 계속 많이 만들어주셨으면...
책 제목: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저자: 이나다 도요시
번역: 황미숙
출판: 현대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