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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May 19. 2024

치킨을 튀기며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가게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은 오 월에 부는 가을바람이었다. 


유리창에 얼굴을 들이대는 오 월의 가을바람과 눈을 맞추며 나는 익숙하게 거품기로 튀김가루를 휘저었다. 그리고 토막 낸 닭을 밀가루 반죽에 담그고 등을 돌려 튀김기 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기름이 짐승처럼 거칠게 뒤채고 있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어쩌면 우주의 굉음만큼이나 큰소리여서 들리지 않는 건지 몰랐다.


나는 밀가루 반죽을 입힌 조각 기름에 집어넣었다. 서로 들러붙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하지만 벌써 1년 가까이 닭을 튀겨온 탓에 손이 알아서 먼저 넣어야 할 부위를 집고 그리고 마치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처럼 일정한 자리에 일정한 부위를 빠트렸다.


비로소 기름에서 거친 소리가 나고 유증기가 심하게 피어올라왔다.


그들은 강한 거부의 몸짓으로 시작했으나 마침내 포용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후라이드치킨이라는 새로운 실제가 탄생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15분. 기름의 온도는 175도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그들의 거부와 포용의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나를 되새김질한다.


나는 들끓는 기름인가? 토막 난 닭인가?

나는 언제쯤 완벽한 후라이드치킨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들끓는 기름을 만나지 못한 닭인가!

나는 닭을 못 만난 채 홀로 들끓는 기름인가!


하지만 나는 감내해야 할 시간도 적정한 온도도 아직 깨치지 못한 허구가 아닌가?




그나저나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아주 오래전 농장에서 일하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어쩌면 브런치에서 정이흔작가의 '닭의 죽음을 애도하며'를 읽은 후유증 때문일지 몰랐다.


그러나 정이흔작가의 글과 기억은 연관성이 전혀 없다.




40여 년 전, 나는 사복 경찰의 추적을 피해 경기도 골짜기에 있는 한 농장으로 숨어들었다.


나를 슬프게 하던 그곳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면 케이지에서 파닥이는 닭 한 마리를 꺼내 문고리에 목을 매달아 놓고 도망치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통로에다 사료포대를 덧대어 깔아놓고 병든 닭을 살려보겠다고 극진히 보살피는 사람도 있었다. 그 역시 나였다.


내가 한 마리 닭을 처형시켰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 농장주인이었지만 내가 하는 짓이, 그러니까 병든 닭을 살려보겠다고 애쓰는 꼴을 못마땅해했다.


그는 쓸데없이 시간과 사료를 낭비하지 말고 살아 있는 닭이나 잘 보살피라며 핀잔을 주거나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병든 닭을 내다 버리지는 않아서 계속 보살필 수 있었다.   




일요일 하루 쉬고 나온 터라 몸은 가벼웠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달리 손님이 절반 정도밖에 들지 않아 느긋한 기분이었다.


닭발하고 후라이드 하나 더 있어요.


내가 주문 알림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여긴 아내가 내쪽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태블릿을 바라봤다. 화면에 새로운 주문이 떠있었다.


예, 알았어요.


나는 더 멀리 시선을 보내 지금 막 들어와 앉은 손님을 일별하고 다시 밀가루 반죽에 빠진 닭조각을 건져 튀김기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오래전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선명하게 펼쳐졌다.




500평 정도 되는 최신설비의 계사에 층층이 쌓인 케이지 속 닭들은 머리를 창살 밖으로 내밀고 급수 꼭지와 사료를 쪼아댔다.


환기 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닭들이 대는 열기와 먼지 그리고 케이지 아래 설치된 컨베이어벨트에 쌓여가는 닭똥 냄새는 곤혹스러웠다.


전기세를 아끼기  위해 서너 달에 한번 정도만 컨베이어벨트를 가동해서 닭똥을 계사 밖으로 배출했던 까닭이었다.




닭들이 케이지에서 빠져나와 통로 사이로 달아나거나 환기 구멍을 통해 계사 밖으로 탈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그럴 경우를 대비해 굵은 철사 끝을 낚시모양으로 휘어 수레에 싣고 다니다가 탈영한 닭들을 만나면 발목을 낚아채어 다시 케이지에 집어넣었다.


농장사람들이 탈영한 닭을 잡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덮치는 것은 실패율이 많았다. 닭 한 마리 잡아넣기 위해 농장주인과 두 아들이 신경전을 벌이며 포위망을 좁혀가는 광경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쫓기는 닭한테도 여간 스트레스가 아닐 터였다. 여러 마리가 나와서 돌아다니는 날에는 닭 잡느라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발명한 닭 잡는 철사는 거의  실패가 없어서 다들 신기해했다. 닭은 눈이 어두워 긴 철사가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하고 멀리 있는 사람만 경계하는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죽은 닭을 꺼내서 버리기 위해 수레를 몰고 계사를 순회할 때마다 나는 어지간한 장비를 모두 가지고 다녔다.


케이지를 수리할 일이 생기거나 급수꼭지가 부러지고 막혀 있을 때 그 넓은 농장을 가로질러 창고까지 갔다 오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연장을 챙겨 다니는 걸 나는 보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500평 남짓한 계사 다섯 동을 돌며 죽은 닭을 꺼내서 버리고 급수 꼭지를 고치다 보면 절망스러운 하루가 다 가고 밤이 왔다.


하지만 나는 자정 무렵과 새벽녘 두 차례 나와서 병아리가 자라고 있는 계사를 돌며 먹이통마다 사료를 부어주고 물이 잘 나오고 있는지 살펴야 했다.


빽빽한 병아리들 속에서 죽어 있는 병아리들을 찾아내어 버리는 것도 빠트리면 안 되는 중요한 일과였다.




내가 돌본 병아리들은 주인집 아들들이 돌보던 때보다 열흘 정도 빨리 자란다며 농장주인은 좋아했다.


지만 나는 슬펐다.


그 닭들은 500평 계사에서 살고 있는 종계와 달리 45일 전후로 해서 팔려나갔다.


나는 그 닭들을 열심히 키우고 다 큰 뒤엔 닭들의 발목을 낚아채 상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숨어 지낼 집과 밥 그리고 약간의 용돈을 받기 위해 한 일이었다.




농장주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월급을 떼어먹었다. 급수통에 타주어야 할 항생제가 사라졌다거나 닭이 너무 많이 죽었다면서 그 책임을 나에게 물었던 것이다.


나에겐 휴일이나 명절도 없었다. 휴일이 있었다 해도 갈 곳도 없었다. 고문을 못 이겨 학우들의 이름을 팔아먹는 배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우리는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렸다. 때문에 우리는 바깥 상황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었다.




농장엔 닭들을 위해 끊임없이 불경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지우리에게 어떤 위로나 희망을 주는 것은 없었다.


바람조차 닭을 위해서 불었고 개도 닭을 위해 짖었다. 당시 나는 그저 닭을 위한 설비였을 뿐이었다.  


그곳 농장에 취업하던 날부터 두어 달에 걸쳐서 나는 낡고 오래된 계사에서 새로 지은 넓고 적한 계사로 수만 마리의 닭을 옮겨야 했다.


물론 나 혼자 한 일은 아니었다. 농장주인 내외만 빼고 부화장에서 일하는 김 씨 부부 내외농장주인의 두 아들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서 닭을 신축 계사로 옮기는 일매달렸다.


다행히 내 아내는 농장주인의 아내나 두 아들의 아내처럼 집에서 나를 기다릴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이 기쁘고도 슬펐다.


다른 여자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내는 텅 빈 방에 홀로 누워서 자는 시늉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농장주인이 우리에게 제공한 원룸구조의 별채엔 숟가락 몇 개와 냄비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도망치는 신세였기 때문에 무엇을 살 돈도 없었다. 돈이 있었 해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갈 수 있다는 읍내까지 나다닐 배짱도 없었다.


사정이 그러니 잠자는 시늉 말고 아내가 달리할 수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농장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부터 나는 아내가 허약해서 일을 할 수 없다고 선언한 터였다. 때문에 아내가 주인집 여자들처럼 농장에 코빼기조차 내밀지 않아도 마음이 떳떳했다.


그것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고 다행스러웠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아내는 그 고단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화장 김 씨가 비닐하우스를 연상케 하는 오래된 계사의 불을 끄고 닭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면 우리는 쪼그려 앉아 닭의 발목을 낚아챘다.


부화장 김 씨의 아내는 완력이 얼마나 쎈지 일하는 내내 남자에 뒤지지 않고 여덟 마리 닭의 발목을 낚아채서 들고 다녔다.


오래된 계사에도 케이지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불을 끄지 않았다. 겁먹은 닭들이 구석으로 달아나면 케이지 문을 열어젖히고 닭의 발목을 낚아채어 가차 없이 끄집어냈다. 


닭털이 뽑혀 휘날리다 콧구멍에 들러붙고 닭똥이 날아와 눈두덩을 때려도 한번 잡은 닭의 발목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저 고개를 세게 흔들어  보는 수밖에.



닭을 전부 옮기고 난 뒤부터 종계 신축 계사 다섯 동과 육계를 키우는 계사 세 동을 혼자 도맡아서 돌봐야 했다.  


하지만 나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꾀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했다. 아내의 몫은 물론 장정 서너 사람 몫을 해냈다.


혹시 영악한 농장주인이 우리를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 다니는 신세라고 짐작하고 있다고 해도 내 노동력이 아까워서라도 신고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나는 농장사람들이 우리를 범죄자로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새파랗게 젊은 부부가 산골 농장까지 기어들어와 일자리를 구걸할 리 없으니까.




농장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는 아내를 위해 나는 한 밤 중에 몰래 계사에 들어가 닭 한 마리를 처형했었다.


닭모가지를 비틀어 죽일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끈을 닭모가지에 걸어 문고리에 매달아 놓고 도망쳤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돌아와 죽은 닭을 거두어 집으로 돌아갔다.


우두커니 앉아 있던 아내는 내가 잡아온 닭을 보고 놀라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뻔뻔하게 물을 끓여 닭털을 모조리 뽑았다. 그리고 닭을 토막 내어 고추장을 넣고 닭볶음탕을 끓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내는 한 조각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나 역시 한 조각 정도 먹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닭털과 그대로 남은 닭볶음탕을 농장 뒤편 깊은 웅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곳은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죽은 닭들을 파묻기 위해 굴삭기로 파놓은 닭들의 무덤이었다.  




돌아오니까 아내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옆에 다가앉으며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민우 오빠, 우리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야. 그냥 자수하면 안 될까.


나도 차라리 자수하고 싶지만 고문이....... 갑갑하더라도 조금만 더 참자. 세상이 바뀌든지...... 잡힐 사람 다 잡히고 나면...... 잡혀도 고문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학우들의 이름을 팔아서 목숨을 구걸할 일도 없을 거고.......


나는 더듬더듬 말했지만 나조차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바껴.


아내는 아예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곧 울음이 잦아들었고 훌쩍임 끝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피곤했던 나는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워 있다가 금방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가 내 가슴을 베고 눕는 바람에 깨었다.


그녀를 안아주려고 손을 뻗었는데 등이 만져졌다. 눈을 떠보니 알몸이었다.


나를 가져도 돼.


아내가 별다른 감정 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슬픔에 잠기어 아내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지숙아.....


나는 가만히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울지 않는데도 눈물이 양쪽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내도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지숙아.....


나는 몇  차례 더 이름을 부르다 잠이 들었다. 




자정 넘어서였다. 나는 병아리들에게 사료를 주기 위해 일어났다. 아내는 옷을 갖춰 입고 내 옆에서 조금 떨어져 자고 있었다.


그 후로 아내는 내 앞에서 옷을 벗지 않았고, 내 곁에 다가와 눕지도 않았다. 아내는 잠을 자고 있지 않아도 늘 저만치 떨어져서 자는 시늉을 했다.  


나도 다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미리 조리해서 한 접시씩 소분해 놓은 닭발을 프라이팬으로 불질하면서 다른 한 손엔 토치를 들고 불향을 입히는 중이었다.


아내가 오른쪽으로 다가와서 뭐라고 속삭였지만 안 들리는 귀여서 알아듣지 못했다.




당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농장주인의 두 아들의 신고로 나는 농장에서 아내는 집안에서 체포되었다.


내 나이를 무려 여섯 살이나 속인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농장주인의 아들들과 같은 또래가 되어 있었다.


두 아들과 서로 얼굴 볼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들이 계분(닭똥)을 실러 오거나, 계사 앞에 모아놓은 계란을 가지러 올 때마다 삽질로 계분을 퍼주거나 계란을 트럭에 실어주면서 보는 게 다였다.


그럴 때 말을 섞는 경우가 있었는데 나는 자연스럽게 반말로 그들을 대했다. 형제들이 먼저 반말을 해와서 나도 그리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대놓고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나는 굽히지 않고 반말로 응수했다.




방에 틀어박혀 지내던 아내가 햇볕을 쏘이러 밖에 잠깐 나왔다가 바람에 이끌리어 산 아래까지 산책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틈을 타 방구석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뒤졌던 모양이었다. 가방에는 신분증과 학생증이 있었다.  


어느 날 형제는 민우가 아닌 내 진짜 이름을 대면서 나이도 어린 새끼가, 라며 주먹다짐까지 했다. 하지만 분이 안 풀렸는지 나를 안심시켜 놓고 가서는 우리를 경찰에 신고해 버렸다.




형제들에게 맞은 지 사나흘 후쯤에야 경찰이 들이닥쳤다. 나는 경찰을 피해 계사 환기창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문득 집 안에 있을 아내가 안타까워 그대로 멈춰 섰다.

 

잔뜩 독이 오른 경찰은 나를 보자 무작정 싸대기를 올려붙였다. 오른쪽 고막에서 퍽 소리가 나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군사 정권의 하수인, 비겁한 허수아비 새끼....... 나는 오른쪽 귀를 감싸 쥐고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경찰은 주먹으로 오른쪽 귀를 차례 가격했다. 나는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경찰이 구둣발로 입을 짓이겼다.




경찰 두 명이 취조실 한편에 있던 물탱크에 내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파열된 귀와 코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후로 파열된 오른쪽 고막은 염증으로 악화되었고 결국 청각 상실로 이어졌다. 오랜 세월 뒤에 의사는 종양덩어리가 된 내 오른쪽 고막을 아예 들어내어버렸다.




아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깜박 잊거나 어느 쪽인지 헷갈려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미친 아내는 얼른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었다.


지숙이가 왔어.


그제야 아내의 말을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돌렸다. 지숙은 우리가 가게를 연 뒤로 거의 매일 오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거의 열흘 동안 안 와서 우리 부부는 무척 궁금해하던 차였다.


지숙은 여느 때처럼 혼자 와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우두커니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가끔 입가에 슬픈 미소를 지으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흔들기도 했다.



  

우리는 지숙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했다. 지숙이란 이름은 순전히 우리 부부가 대화할 때 쓰려고 지어놓은 것이었다.


지숙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우리는 대화 중에 그녀를 주정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손님을 그렇게 부르는 게 미안하고 불편해서 내가 이름을 지었는데 술 주자를 써서 주숙이라고 했다가 농장에서 한 때 살았던 아내 이름이 생각나서 지숙이라고 부르자 했다.



개업하기 며칠 전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닭을 튀겨보는 거라서 연습도 할 겸 가게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님들이 장사하느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무작정 들어와 앉기도 했는데 처음엔 그냥 돌려보내다가 자꾸 반복되다 보니 미안해서 닭을 튀겨 대접하기 시작했다.


돈을 안 받는다고 해도 기어코 돈을 놓고 간 손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마저 다시 돌려주었는데 지숙이가 사 온 두루마리 휴지만큼은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날 이후로 지숙은 거의 매일 와서 안주와 술을 시켜놓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돌아가곤 했다.


왼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그녀가 게걸음으로 주방에서 일하는 내게 다가와 나한테 뭐라고 속삭이면 취한 것이고 기척도 안 하고 소리 없이 들어와 자리에 가 앉으면 멀쩡한 것이었다.


어느 날 지숙이가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보려고 몸을 돌려 왼쪽 귀를 가져다 댔다.


오빠, 미안해. 많이 팔아줘야 하는데.


지숙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삭였다.


괜찮아. 안 팔아줘도 되니까 술 적당히 마셔. 안주도 그만 시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늘 고개만 끄덕이던 나는 마침내 지숙에게 대꾸를 해주었다.


내 맘이여.


지숙은 싱긋이 웃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숙은 늘 하던 습관대로 소주, 맥주, 화요, 명품진로, 살얼음 생맥주, 청하, 별빛 청하, 막걸리 등 갖가지를 자기 마음대로 꺼내갔다. 그리고 술마다 다른 잔을 가져갔다.


하지만 따라만 놓고 마시지 않거나 한 잔 정도 마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주도 서너 가지씩 시켜놓고 손도 대지 않고 그냥 가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입맛이 당기면 먹는 날도 드물게 있었다. 그런 날은 연신 주방 쪽을 바라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오빠 맛있어를 외쳐댔다.


오빠, 치킨 맛있어.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치킨은 처음인데. 오빠 해파리냉채, 죽인다. 오빠, 요리 정말 잘하네. 왜, 난 몰랐을까. 왜, 난 그걸 몰랐을까. 몰랐을까.


후렴구처럼 몰랐을까, 난 왜 몰랐을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 나는 지숙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아내는 단골로 친해진 손님을 바깥까지 따라나가 배웅하곤 했는데 지숙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지숙이가 당신을 너무 좋아해. 가기 전에 당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애틋한지.... 내 마음이 다 아파. 그런데 지숙이가 말이야.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좀 이상이 있는 것 같아. 당신을 좋아해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지숙을 배웅하고 돌아온 아내는 종종 그런 말을 했다.




지숙이에게 정신병력이 있다는 건 나중에 한 단골손님에 의해 밝혀졌다.


옛날엔 삿대질하고 소리 지르면서 이 동네를 휘젓고 돌아다녔는데. 이 동네 오래 산 사람들은 다 알 거야. 욕도 엄청 잘하고. 이제 많이 좋아졌네. 몇 해 안 보이더니 정신병원에 있었나? 예쁘게 생겼는데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카드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아내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크게 말했다 해도 지숙은 양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어서 알아들을 리 없었다.  




또 어떤 손님은 지숙이가 근처 술집을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유혹하는 여자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우리는 지숙이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가게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 데다 지숙은 늘 하던 그대로 슬픈 얼굴로 창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냉장고에서 술을 가져갈 때마다 나에게 말을 걸려고 주방 앞으로 다가오는 것 말고 달리 이상한 점도 없었다.


나는 바빠서 대꾸해 줄 수도 없었지만 항상 지숙이가 오른쪽에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지숙이가 말을 걸어오면 그냥 웃어주었고 술은 조금만 마시고 안주를 많이 먹으라고 당부하는 게 전부였다.




어느 날 한 손님은 지숙이가 얼굴에 손을 너무 많이 대서 옛날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도 했다. 예순이 넘었는데 주름도 없고 저리 뽀얗고 예쁜 게 다 성형을 많이 해서 그런 거라고.  


그날 이후 우리는 지숙의 얼굴에서 성형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지숙은 그냥 자연 미인이라는 게 우리의 확신이었다. 언제나 창이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어서 성형 흔적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을 거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지숙이가 창가 기둥 옆 자리에 매일 같이 앉아서 술 병을 갖가지로 가져다 놓고 술을 마시니까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단골손님 중 두엇은 지숙이가 아내의 친구 혹은 우리 부부의 친척쯤으로 짐작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오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부부는 해명하기 바빴다. 술은 마개만 따놓고 거의 마시지 않는다. 몇 잔의 술에 곧잘 취하기는 해도 노래만 듣다가 간다. 자신의 카드와 아빠의 카드를 번갈아 쓰는 것 같다. 아빠의 카드를 쓸 때는 영수증을 챙겨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허락을 받고 오는 것 같다.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검은 가방은 샤넬이고 모자며 신발, 재킷이 모두 비싼 명품이에요.


젊은 손님 하나가 우리에게 귀띔을 해줬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해 그런가 보다 여겼다. 그리고 그녀를 돌봐주는 아빠가 있고 가난하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었다.  




도피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짜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농장에 위장 부부로 취업을 한 뒤로도 가짜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행여 실수하지 않기 위해 집안에서 단 둘이 지낼 때도 가짜 이름을 썼다.


우리는 가짜 이름에 차츰 익숙해졌다. 도피 중이어서 그런지 진짜 이름보다 가짜 이름이 부르기도 듣기도 편하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그녀의 진짜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지숙은 아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몰라 볼 수는 없었다. 사실 이름뿐만 아니라 얼굴도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세 마리째 치킨을 튀기다가 지숙이라는 가짜 이름에 묻혀버렸던 그녀의 진짜 이름을 기억해 냈다.


말숙이.


지숙의 진짜 이름은 말숙이었다. 오 남매 중 막내여서 그렇게 지었다 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니 그건 스무 살 지숙의 얼굴이 아니라 지금 창가에 슬픈 얼굴로 앉아 있는 지숙의 얼굴이었다.


이 지숙이가 그 지숙일 리도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닭을 튀김기름에 다 집어넣고 나서 무작정 지숙에게로 다가갔다. 닭이 익기까지 15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숙은 내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지숙의 앞에는 벌써 갖가지의 술 병이 늘어져 있었다.


지숙아.


나는 무작정 불러보았다. 지숙은 인기척을 느끼고 을 떴지만 못 알아들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말숙아.


나는 지숙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씨발놈아. 말숙이는 죽었어.


지숙은 얼굴을 찌푸리며 험한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 눈을 올려다보며 검은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과장되게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 이름은 지숙이잖아. 경찰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괜찮아. 여긴 경찰 없어.


나는 지숙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우리 아는 척해도 되는 거야?


그래 다 끝났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우리 집에 가자. 아빠가 오빠 오길 기다리고 있어.


집엔 못 가. 그런데 지숙아, 언제부터 나를 알아봤니?


나는 지숙 앞에 다가앉았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안 되는 거야. 알았어. 그러면 모른 척할게.


지숙은 표정을 바꾸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지숙의 하얀 얼굴 위로 쓸쓸함이 짙게 내려앉았다.


나는 미칠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수갑을 찬 채 봉고차에 실려 후송될 때였다. 지숙은 눈을 내리깐 채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나는 가끔씩 떠는 그녀의 머리와 손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당차고 씩씩한 줄로만 알았던 지숙이었다.


손가락 그만 깨물어.


나는 피가 날까 봐 걱정되었다.


지숙은 잠시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고 곧 다시 손가락을 깨물었다.   


나중에 지숙이가 수사관의 강압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는 소문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덕분에 지숙은 교도소 대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도 들려왔었다.


그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지숙이가 여태 정신병을 앓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나는 창밖 저만치에 서서 지숙을 바라봤다.


사십여 년이 지나도록 지숙의 삶은 도피 중이었고 여전히 스무 살 그때의 위장 신분으로 살고 있었다.  



작가님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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