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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Jun 27. 2024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영문을 몰라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보는 남편을 말없이 차에 태운다. 


첫째네 학교, 둘째네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도 한 명씩 차에 태운다.

모두들 놀라면서도 좋아한다. 일상의 직장이나 학교 같은 건 내일 닥칠 종말 앞에서 순식간에 그 쓸모를 잃어버린다.


 네비게이션에 강원도의 한 바닷가를 목적지로 입력한다. 2년 전 여름 휴가로 머물렀던 곳이다. 뜨거운 태양과 출렁이는 파도, 까맣게 탈 때까지 물놀이를 하다가 저녁에는 야시장을 거닐며 즐거워하던 날들... 이곳이라면 마지막에 느낄 절망감조금은 희석되지 않을까.

 

 우리는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함께 모래사장을 거닐기로 한다. 갑작스런 여행에 신이 난 아이들은 옷이며 신발 버릴 것은 조금도 생각치 않고 밀려오는 파도에 뛰어들고 두 손으로 모래를 듬뿍 집어 허공에 흩뿌린다.

 남편은 핸드폰을 들어 천진한 아이들의 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는다. 가끔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하하하, 웃기도 한다. '참 행복하다, 그렇지?'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본다. 두 눈에 지금의 순간을 판화처럼 꾸욱 눌러 담기 위해 애를 쓴다.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가 볼 세라 황급히 닦아낸다. 때때로 어색하게 웃어도 본다.


 평소에는 잘 사주지 않던 헬륨 풍선이나 커다란 솜사탕도 이날만큼은 군말 없이 사준다. 이때쯤이면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엄마, 오늘 무슨 날이야?”하고 물어올 것이다. 남편은 이미 한참 전부터-내가 가족을 차에 태우고 네비에 목적지를 누를 때부터-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중이다.

 눈치 빠른 그에게는 뭐라고 설명을 해야 좋을까. 그는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라 닥쳐올 종말을 안다면 괴로워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소리를 지르며 길길이 날뛰겠지. 그러므로 그에게는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대신에 어디 복권에라도 당첨됐다거나 특별 보너스를 탔다고 둘러대기로 한다. 어설픈 연기력에 그가 속길 바라면서 말이다. "특별 보너스라고! 그러면 전에 봐두었던 그 티셔츠 하나 사도 될까?" 그래, 이게 낫겠다. 비로소 그는 경계하는 대신에 아내의 일탈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날이 저물어 간다.

 근처 숙소의 가장 좋은 방을 예약한다. 저녁 메뉴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뷔페, 혹은 남편이 먹고 싶다던 고급 회를 먹어본다. 뭐가 됐든 그대들이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시키자.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은 한 예민한 여자를 단번에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꾸기도 한다.

 모두들 기분 좋게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들이니만큼 천천히 음미하며 먹으려 한다. 쫀득하고 차가운 생선 살, 쌀밥의 뜨끈한 낟알들이 혀를 지나 순식간에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이 와중에도 포만감을 느끼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순간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일분일초 최대한 집중한다. 신중하게 이 시간을 즐기려고 노력한다.

 

 잘 시간이다. 아이들을 씻기고 머리를 말려주고 포근한 이불을 덮어주는 내내 엄마가 얼마나 너희를 사랑해왔고 사랑하는지를 온전히 전달하려고 애를 쓴다. 연신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이마와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다. 아이들은 고단했는지 스르륵 눈을 감는.  입가에 미소를 깊은 잠에 빠져든다.


 캔 맥주를 홀짝이며 야구 중계를 보는 남편에게 다가간다. 어깨를 안아준다. 그동안 고마웠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가 TV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당신 오늘따라 이상하다고, 자꾸 왜 그러냐며 의아한 듯 묻는다. 잠시 망설이다 그냥, 하고 얼버무린다. 싱겁게 웃는다. 웃음 끝에 입술이 파르르 떨려온다. 


 모래사장에 앉아서 파도 소리를 듣는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나부낀다. 추워서 도무지 견딜 수 없어질 때쯤, 친정집에 전화를 걸어본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고 당신이 깜짝 놀라 전화를 받는다. 잠에 취해 목소리가 잠겼다. 에 웬 일이냐며 혹시 ㅇ서방이랑 싸운 거냐고 묻는다. 싸우긴 무슨, 그냥 생각나서 전화를 봤다고 답한다. 평소처럼 안부를 묻는다. 목소리를 들었네. 그거면 됐네. 가슴에 담아뒀던 마디의 말들을  할까 망설이는데 자꾸만 목이 멘다. 맥 없이 전화를 끊는다.


 때때로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지면  차분히 가라앉히려 애를 쓴다. 끅끅대며 울음을 참는다. 마음을 추슬러본다. 눈물을 닦는다. 지난 날을 회상한다. 때때로 미소가 지어진다. 지평선 너머로 붉게 동이 터온다.


 우리의 마지막은 이왕이면 고통이 적고 편안하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숙소로 돌아온다. 눕는다. 평화롭게 잠든 가족의 옆 얼굴을 바라본다. 어린 아이의 고른 숨 소리를 듣는다. 나 역시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 까무룩 눈이 감긴다.


눈을 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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