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보는 거 더 재미있게
특정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다른 작품을 예습해야 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지 않은 편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거나, 다른 작품에 대한 오마주를 알아채는 순간 찾아오는 재미와 감동을 오롯이 느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슨 영화 한 편 보는 데 그렇게 거창한 준비가 필요하냐는 식의 원성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도 같지만, 한 번이라도 여러 작품들 사이의 연쇄적인 상호작용으로부터 비롯되는 벅찬 감동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예습의 중요성에 쉬이 공감을 표할 수밖에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작품에 대한 감상이 선행된다면 더욱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분명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여러분께 선사하게 될 터이니, 충분히 시간을 들여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모름지기 2018년 영화계 최고의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였다. <E.T.>, <쥬라기 공원>,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통해 SF 영화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우주전쟁> 이후 무려 13년 만에 다시 연출을 맡은 SF 장르 영화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가상현실 세계 '오아시스'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가상현실 세계의 경영권을 독차지하려는 거대 악덕기업 I.O.I.로부터 '오아시스'를 지키기 위해 주인공 일행이 벌이는 뜨거운 사투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모두가 자신의 아바타를 자유로이 꾸밀 수 있는 가상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영화, 드라마, 게임 등 수많은 유명 매체 속 캐릭터들이 등장인물들의 아바타로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영화 속에서 본인이 알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레디 플레이어 원>을 즐기는 하나의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처럼 친숙한 캐릭터들을 영화 속에 등장시키는 것 외에도 <백 투 더 퓨처>, <아이언 자이언트> 등 지금까지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여러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를 통해 수많은 마니아들을 열광케 하며 '대중문화를 향한 최고의 헌사'와 같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무수한 오마주를 통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품들을 영화 속에 녹여낸 <레디 플레이어 원>이지만, 그중에서도 영화 속에서 가장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하나 고른다면 단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80년 영화 <샤이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샤이닝> 속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이 극중 주요 무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 <샤이닝>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는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패러디 요소들이 결코 적지 않은 비중으로 곳곳에 산재해 있으니 말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면 <샤이닝>을 우선적으로 감상할 것을 적극 권하는 이유이다.
필수 예습 작품: <샤이닝> (1980)
예습해두면 좋은 작품: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1985~1990), <아이언 자이언트> (1999),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1991), <토요일 밤의 열기> (1977) 등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21년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집필한 동명의 단편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원작으로 하여 제작된 작품이다. 일본 내 명망 있는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그의 전속 운전 기사 '미사키'가 상호 간의 교감을 통해 과거의 아픔과 서서히 마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드라이브 마이 카>는 특유의 정적인 연출 속에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훌륭히 녹여내며 대중과 평단 양측으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내 세계 유수의 시상식을 휩쓸며 그 저력을 널리 과시하기까지 했으니, 가히 2021년을 빛낸 최고의 영화 중 한 편이라는 평가를 내리더라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응당 영화의 원작에 해당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먼저 읽어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으나, 사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원작보다도 더욱 우선적으로 접해야만 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안톤 체호프의 대표 희곡 '바냐 아저씨' 되시겠다. 영화 속에서 '가후쿠'가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원작으로 하는 연극을 연출하는 만큼 해당 희곡이 극중 주요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바냐 아저씨'가 그리고 있는 인생의 허망함이야말로 <드라이브 마이 카>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에 해당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냐 아저씨'라는 작품에 대한 이해 여부에 따라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감상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수 예습 작품: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예습해두면 좋은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 '셰에라자드', '기노' 등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수록 단편들
<위플래쉬>, <라라랜드> 등으로 이름을 알린 데미언 샤젤 감독의 최근작 <바빌론>은 영화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무대와도 같은 할리우드가 이룩해낸 영광과 그 뒤의 어두운 이면을 모두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영화를 향한 최고의 러브 레터이자 헤이트 레터라는 평가를 받아 세간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1920년대 격동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거대 영화 산업의 본격적인 태동기를 다루고 있는 해당 영화는 쉴 틈 없는 서사와 화려한 연출을 통해 관객들의 몰입감을 끊임없이 고조시킨다. 영화 산업이 이루어낸 엄청난 규모의 발전을 향한 거대한 존경과 애정, 그리고 그 뒤편에서 조용히 사라지거나 희생되어온 가치들에 대한 추서로 점철된 <바빌론>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커다란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수많은 고전 영화를 오마주하며 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한 <바빌론>이지만, 관람 전 필수적으로 감상해야 하는 작품을 단 하나만 고른다면 진 켈리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은 1952년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빌론>과 마찬가지로 영화계를 주도하는 흐름이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넘어가는 시기인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인 것은 물론, 해당 영화의 사운드트랙이나 일부 장면들이 <바빌론> 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며 극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은 비를 타고>에 대한 이해 없이 결말부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감정선을 온전히 따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더라도 마냥 과장된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필수 예습 작품: <사랑은 비를 타고> (1952)
예습해두면 좋은 작품: 모든 영화 (여러분이 한 편이라도 더 많은 영화를 볼수록 <바빌론>이 선사하는 감동은 더욱 거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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